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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수 Sep 23. 2022

두루미와 여우

삶의 터널을 통과하는 법

여우에게 초대받은 두루미. 랄라랄라 여우 집에 갔다. 고기 국물은 접시 위에 담겨 있었다. 여우는 고기 국물을 맛있게 먹었다. 부리가 긴 두루미는 고기 국물을 먹을 수 없었다. 두루미가 접시 위의 고기 국물을 보 순간.  두루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은 '여우가 나를 골탕 먹이려는구나.'와 '내가 접시 위의 고기 국물을 못 먹는 줄 모르는구나.' 둘 중 하나 것이다. 두루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스쳐 지나갔던, 여우가 어떤 마음으로 식사에 초대했는지 물어봐야 했다.  

"나를 골탕 먹이려고 했지?"라거나 "나를 왜 초대한 거야?"라는 여우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이다. 두루미가 여우에게 "여우아, 고기 국물 냄새 끝내줘. 너무 먹고 싶은데. 부리가 길어서 먹을 수가 없네."라고 말한다면. 여우가 대답을 하든 든, 두루미는 여우가 자신을 초대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뭐? 이렇게 맛있는 걸 못 먹는다고? 그럼 먹지 마. 내가 다 먹을 테니까." 여우가 이런 식의 대답을 하거나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면, 여우가 두루미를 골탕 먹이려고 초대한 것이다. 이 여우와 가깝게 지내다간 또 골탕을 먹을 수 있다. 여우가 "미안해. 내가 몰랐어. 어떡하지?"라고 한다면, 두루미는 병 속의 고깃국물을 먹을 수 있다고 말하면 된다. 여우 집에 병이 있건 없건 상관없다. 병은 옆집에서 빌려올 수도 있고 두루미 집에서 가져와도 된다.


두루미는 여우가  무슨 마음으로 초대했는지 알아보지 않았다. 또 기분이 상했다는 말을 하지 않고 여우를 초대해 '너도 한번 당해 봐라'며 주둥이가 긴 병에 고기 국물을 담아 내놓았다.

두루미는 병 속의 음식을 못 먹는 여우를 보며 속으로 통쾌하게 웃었을 것이다. 이런 통쾌함은 여우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여우가 이런 일을 당하고 가만있겠는가. 또 두루미를 골탕 먹이려고 벼를 것이다. 두루미가 여우와의 관계를 끊고 싶어도  끊어지지 않고, 골탕 먹이고 골탕 먹는 관계로 이어질 것이다.


여우가 두루미가 고기 국물을 맛있게 먹기를 바랐다고 치자. 두루미가 접시 위의 고기 국물을 먹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인지 또는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는지 몰라 마음이 불편해질 것이다.


여우가 두루미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다면. 여우가 먼저 두루미에게 "두루미야, 왜 고기 국물을 안 먹는 거니?"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두루미가 왜 먹지 않는지 편하게  수 있고, 또 여우가 두루미를 골탕 먹이려 한다는 오해를 사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네 살 즈음의 일이다. 동네 친척집에 가서 밥을 먹을 때였다. 시래깃국이 입에 딱 맞았다. 시래깃국을 맛있게 먹다가 깜짝 놀라 숟가락을 멈추고 말았다. 시래깃국 속에 보이는 어떤 물체가 밥알인지 구더기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른들이 먹으라고 했지만 먹을 없었다.


그날 이후, 배불리 먹은 기억이 없다. 배 고픈 게 일상이었다. 음식 먹는 것을 싫어하던, 어린 나는 알약 하나로 일주일이나 한 달간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길 바랐다.


시래깃국 속에 들어있던 물체가 무엇인지 물어볼 수 없었던, 나는 불편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은 세상이 오기를 바랐다. 불편한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고. 회피한 것이다. 


어린 내가 문제를 회피했다고 탓할 수 없지만.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처럼, 성인이 되어서도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피해 다녔다. 그 대가로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야 했다. 두루미와 여우가 문제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저들도 삶의 터널을 통과하는 중인 것이다. 우리도 각기 제 삶의 터널을  통과할 수밖에 없지만. 가볍게 혹은 단기간에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 방법 중에서 첫 번 째는 자신을 불편함에서 혹은 고통 속에서 구출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오랫동안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고통 속에서 구출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고. 또 그 마음이 있지만 강렬하지 않아, 쉽게 포기하기 때문이다. 두 번 째는 그 일이 왜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지 또는 고통스럽게 하는지. 제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세 번째는 터널의 끝은 항상 열려있으니까, 빠져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터널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이면 어떠랴. 맘만 있으면 돌아 나올 수 있다.


두루미와 여우가 접시 위의 고깃국물이나 목이 긴 병 속의 고깃국물을 먹을 수 없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불편할 수는 있지만. 간단히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루미가 여우 마을에 갈 때는 병을, 여우가 두루미 마을에 갈 때는 접시를 들고 가면 된다. 진짜 문제는 접시와 병을 소유할 능력과 접시와 병을 들고 다닐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불편한 상황에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역시 문제다.


두루미는 불편한 상황에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여우가 음식을 접시 위에 담아내, 두루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보다 더 큰 문제인데 말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있지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고 ,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문제가 뭔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삶의 문제를 찾아내고 해결하려면 무엇보다도 문제를 해결하고 말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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