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바람은 제 갈 길을 갔고

부제: 나는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by 할수 최정희

제목: 바람은 제 갈 길을 갔고

부제: 나는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전 버스 안에서 차창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바로 그때, 노란 은행잎들이 우포늪 쪽으로 우르르 날아갔습니다. 밖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겠지요. 같은 공간이었지만, 유리창이 바람과 나 사이를 막고 있어서 나는 바람의 세기나 체취를 직접 느끼지는 못했어요. 은행잎이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바람이 가는 방향과 그 세기를 짐작하고 있었지요. 은행나무는 결국 이파리들을 떠나보내고 말았는데 말입니다.


나무와 이파리는 작별의 말조차 서로 나누지 못했겠지요. 이파리는 하던 일을 그대로 두고 황급히 떠나게 되었겠고요. 나무는 잎사귀들이 조만간 떠나가리란 걸 어렴풋이 알고는 있겠지만요.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떠나가듯이, 이리 급박하게 떠나갈 줄은 짐작 못했을 겁니다. 나무는 멍하니 날아가는 잎사귀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겠지요. “잘 가”, “가지 마”... 그 어느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뗐을 때는 이파리들이 저 멀리 날아간 뒤였을 겁니다.


아마도 바람이 은행나무 옆을 지나가다 겉옷 자락이 가지에 걸렸나 봅니다. 갈 길이 바쁜 바람이 급히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잎들이 휩쓸려 간 것이겠지요. 저항할 새도 없이 휩쓸려 가는 저 잎사귀들이 꼭 그날의 저를 닮았습니다. 그렇게 서두르는 바람을 보니 문득 그날 일이 떠오릅니다. 오래전이었지요. 바람이 저를 스치고, 아니 바람이 내 삶의 한복판을 관통해 지나간 일이 있었지요. 그때도 바람은 용무가 무척이나 긴급했나 봐요. 숨을 헉헉대며 옷자락을 펄럭이던 바람, 그 긴 꼬리에 제 옷자락이 감겨들면서 저도 함께 휩쓸려 버렸지요.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나는 은행잎처럼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이내 땅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아파서 내지른 내 비명은 바람의 통곡 소리에 부딪혀 이리저리 흩어졌습니다.


바람이 얼마를 더 내달렸는지는 모릅니다. 갑자기 바람이 아래로 곤두박질쳤어요. 무언가에 부딪힌 듯 크게 휘청거렸습니다. 그때 바람의 옷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졌고, 그 반동으로 나 또한 아래로 추락해 땅에 머리를 박고 말았답니다.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아픈 머리를 들어 올릴 때, 이미 바람은 긴 꼬리를 휘날리며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한동안 멍한 채 시간을 보냈지요. 어느 순간에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이 일어난 거예요. 그때 나는 그곳을 ‘오즈의 나라’라고 이름 지었어요. 도로시처럼 뜻밖의 곳에 떨어졌지만, 그 여정에 어쩌면 나의 해답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도로시를 만난다면 그 낯선 길을 간 경험담이라도 듣고 싶었어요. 그러면 내 길을 찾아가는 실마리가 생길 것 같았거든요.


어느 갈림길 앞에 멈춰 섰을 때입니다. 지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자, 꼼짝 않고 서 있는 내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이때 내가 바로 도로시와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가던 그 머리가 텅 빈 허수아비나 마찬가지란 걸 알게 되었어요. 지혜가 없으니, 몸이 고생해야죠. 무작정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어디로 간들 쉬운 길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데 발이 떨어지질 않는 거예요. 낯선 길 앞에서 덜덜 떠는 다리를 가진 나는, 용기를 찾아 헤매던 겁 많은 사자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이런 나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었어요. 깡통나무꾼처럼, 온기가 사라진 심장을 안고 서 있는 나를 말이지요.


바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바람은 그저 자신의 길을 용감하게 가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길이 최선인지 차선인지 따지지 않고 말이죠. 지혜가 없다면 길을 가면서 배우는 수밖에 없다는 걸 바람은 이미 알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자신을 탓하기보다, 무작정 내달리기를 선택했겠지요.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세 인물을 차례로 마주쳤습니다. 두려움으로 떨던 사자, 세상살이의 감이 없던 허수아비,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던 깡통나무꾼. 이 셋은 꽁꽁 숨겨두었던 나의 다른 얼굴들이었습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혼자서는 못 할 일이지만 이 셋이 힘을 합치면 뭐든 할 수 있겠지요. 나는 비로소 용기가 생겼어요. 우포늪 철새들과는 달리 돌아갈 곳도, 정해놓은 곳도 없었지만요. 나도 도로시처럼 나와 함께 길을 갈 세 명의 친구들이 생겼으니까요. 길을 걸으며 지혜와 용기, 따뜻한 심장을 얻어 마침내 내가 원하는 나로 되어 갈 테니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어떤 길을 걷든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도착할 그곳이 어떤 곳 인들 가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은행잎들이 날아가던 우포늪은 일만 년의 세월을 견디며 수많은 생명을 품어온 곳이지요. 계절마다 그곳을 찾아 먼 길을 날아오는 철새들에게는, 저 막막해 보이는 하늘 아래 공중에 그들만의 푸른 에메랄드 길이 놓여있었을 겁니다. 아무리 새라도 날아오르지 않는다면 그 길을 찾아내지도 날아가지도 못하지요. 문득 '새에게는 새가 날아야 할 하늘길이 있고, 나에게는 내가 걸어야 할 땅의 길이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은행잎이 철새처럼 날아가는 모습을 머릿속에 다시 떠올려 보았어요. 이파리들이 은행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나왔을 그때 이미, 그 수많은 잎들은 각자의 길로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길이 우포늪으로 곧장 가는 길은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각 이파리들은 각기 저마다의 길을 날아갔을 겁니다.


나의 에메랄드 길은 바람이 나를 떨어뜨린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은 바람이 내게 남기고 간 선물이었어요. 바람은 제 갈 길을 갔고, 나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냈으니까요. 그 길은 바로 글쓰기였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겁니다. 나를 스쳐 갔던 그 바람이 어쩌면 당신 곁을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니면 먼저 당신 곁을 스쳐 내게로 왔을지도 모르고요. 당신은 바람이 떠나간 그 자리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나와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겠지만요. 그 길 어딘가에서, 우리가 마주칠 날도 있겠지요. 바람과 바람이 이어준 인연으로요. 그때 알아보겠지요. 우리가 각자의 푸른 에메랄드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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