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할수 Sep 02. 2022

돼지 삼 형제와 벽돌집

내 취향이라고

 취향대로 사는 사람이 늘고 있.  


엄마 돼지가 돼지 삼 형제를 불러 모았다. 엄마 돼지가 돼지 삼 형제들에게 "다 컸으니, 나가 살아라."고했다. 돼지 삼 형제는 엄마 집에서 나와 집을 지었다.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의 집을 늑대가 무너뜨렸다. 게을러서. 지푸라기 집을, 나무집을 지어서, 그렇다고 한다. 생각해보자.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에게 벽돌집을 지을 여건이 되었는지를. 엄마 집에서 나올 때, 돼지 삼 형제의 여건이 똑같다고 말할 수 없다.

첫째 돼지는 약골이라 지푸라기 집을 지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고. 셋째 돼지는 형들보다 몸이 튼튼해서 벽돌집을 지었는지도 모른다. 달리 생각해보면 셋째 돼지가 겁이 많아서 벽돌집을 지었을 수 있고, 첫째 돼지는 겁이 없어서 지푸라기 집을 지었을 수 있다.


첫째 돼지는 지푸라기 틈새로 보이는 별빛을. 지푸라기 사이로 들어 오른 바람을 좋아했을 수 있고. 비가 좀 새더라도 개의치 않을 수 있다. 훌훌 여행을 떠나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와 다시 지을 수 있고 안 돌아와도 그만인 그런 집을 원했을 수 있다. 둘째 돼지는 나무의 질감과  향을 좋아해 나무집을 지었을 수 있다.


첫째와 둘째 돼지는 셋째의 벽돌집에서 잠시 행복했을 것이다. 벽돌집은 셋째 돼지의 취향으로 지은 집이지, 첫째와 둘째 돼지의 취향이 담긴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돼지는 긴급한 상황에 대피할 곳이 필요했을 뿐. 잠깐의 고난을 핑계 삼아 동생집에 얹혀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으르고 혼자 살기 싫었다면 안 나가겠다고 버텼을 것인데. 엄마 돼지가 "나가 살아라.'라고  했을 때 군말 없이 나왔다.


첫째 돼지는 지푸라기 집에 숭숭 드나드는 바람이 그리울 것이고, 둘째 돼지는 나무의 향기가 솔솔 나는 나무집에서 살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벽돌집이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늑대를 피하기엔 분명히 좋지만.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늑대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요즘의 늑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현관문이나 창문을 통해 들어오지 않는다. 휴대폰 혹은 노트북에서 살기도 하는 늑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사는 늑대들은 벽돌집이라도 소용없다. 창문을 닫아걸고 현관문을 잠가도 막을 수 없다.


늑대 아닌  늑대들은 우리를 단번에 잡아먹지 않. 늑대가 우리를 야금야금 갉아먹을 때, 옆구리를 살살 간질인다.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갉아 먹히는 줄 까맣게 모른다. 뭔가가 어그러져 가는 것을 느끼지만 뭐가 뭔지 모른다. 이게 뭐지? 하는 의구심이 들뿐이다.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 땐 이미 늑대의 입속에 머리가 들어가 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는 사람이 늘고 있. 지푸라기 집을 짓든, 나무집을 짓든, 벽돌집을 짓든, 그 사람의 선택이다. 남의 집을 보고 "밤 놓았네. 대추 놓았네."라는 것은 쓸데없는 오지랖이다. 유목민에게 필요한 건 벽돌집이 아니라, 양 떼의 먹이를 찾아 떠날 때, 쉽게 해체할 수 있는 천막집이다.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려면, 벽돌집이 튼튼하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다음엔 자신을 성장시켜주는지, 망가뜨리는 건지 생각해 봐야 한다. 자신을 망가뜨리거나 성장시켜주지 못한다면 수정해야 한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다가 집만이 아니라 삶이 무너질 수 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서라기보다 벽돌집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세상이어서 그렇다. 우리의 삶이 무너져도 세상은 돌아간. 삶이 무너졌을 뿐인데. 자신이 무너졌다고 착각하 사람이 있,  세상이 무너진 줄 아는 사람이 있다. 


TV나 유튜브를 따라 하는 일은 일시적으로 현된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나를 모르면 나만의 취향대로 혹은 나만의 방식으로 살 수 없다. 나를 무너뜨리는 사람도 나고, 나를  일으킬 사람도 나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나를 무너뜨릴 것은 세상에 없다.


둘째 돼지는 나무 향기 맡으며 목재와 관련된 일을 할 것 같고. 첫째 돼지는 아프리카 정글에서 나뭇가지로 움막을 짓고 며칠 밤을 지내다가, 미련 없이 길 떠나는 삶. 오지탐험가나 돼지계의 족장 김병만(정글의 법 )으로 살아갈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코로나가 우리의 늑대다. 벽돌집에 사는 사람이 코로나에 안 걸렸다는 발표는 없었다. 부지런한 사람들도 코로나라는 늑대의 피해를 입었다. 얼마 전 폭우로 서울의 반지하 주택이 늑대가 되어버렸다. 누가 반지하에 살고 싶어 살겠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대는 모습을 바꿔가며 계속 출몰한다. 어떤 이는 늑대에게 당해 무너지지만. 어떤 이는 늑대의 등에 올라타 역전의 기회를 쟁취하기도 한다. 영끌로 집을 사는 2030 세대들. 집이 늑대로 변할 수 있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잖는가.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요즘은 집값이 올라가면 튼튼하고 안전한 집이라 여기는 세상이라. 지푸라기 집이라도  서로 사려고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안전하게 사는 것을 우선하면  취향대로 살 수없다. 취향대로 사는 건, 일종의 모험이다. 모험처럼 가슴 설레게 하는 일이 또 있겠는가. 용기가 있어야 모험을 떠날 수 있다. 가슴 설레는 삶은 모험을 떠날 용기가 있는 자가 아니라, 모험을 떠난 자의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사자와 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