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runch.co.kr/@c63eebf80d7b4fe/92)를 쓰고. 잠자리에 들 때는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꿈을 포기해야 했던 열아홉 살의 나에게 "난 괜찮아. 넌 최선을 다했어. 최선을 다해 살아줘서 고마워."라고 쓸 때. 심장이 울컥 눈물을 쏟아낸 까닭일까. 이불을 덮고 누웠는데.
심장 속에 버지니아 울프가 헤엄을 친다. 그녀가 팔을 뻗치고 다리를 오므렸다 뻗칠 때마다 심장이 시큰거린다. 난 버지니아 울프처럼 살고 싶었다. 한 인간으로서 살지 못한 아픔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다. 입술을 다물고 목구멍 속으로 삼키지만. 아픔은 더 세게 밀고 올라온다. 입 속에 가득 찬 아픔. 나도 세상 구경 한번 하겠다며 바깥으로 튀어나오려고 버둥거린다.
입을 앙다문다. 입 속에 갇혀서 꼼짝 못 하게 된 아픔. 꼭 세상 밖으로 나가겠다고 발버둥 친다. 입속에서 폭발해버릴 것 같다. 심장에서 목구멍까지 밀고 올라오는 아픔을 도로 삼키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다. 아버지가 편찮으신데. 열아홉 살 내가 꿈을 포기했다고 소리쳐 울 수 있었겠는가.
내가 봉사하거나 희생하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가슴에 보람과 기쁨이 그득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삼 때부터 40년간 내 삶은 봉사와 희생의 나날이었으니까. 내가 봉사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힘겹지 않은 선에서 소소한 봉사를 좋아할 뿐인데. 내가 닳아 없어지기까지 했으니. 허망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내가 종교를 갖게 된 것은,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그때 삶이 영원한지 알고 싶었다기보다, 삶이 영원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종교는 삶이 영원하다고 했다. 나는 위로를 받았고, 영원한 삶을 위해 살기로 선택했다. 이 선택은 아버지 병환으로 가족을 위해 나를 희생했듯, 영원한 삶을 위해 또 나를 희생하게 만들었다.
영화 '82년 생 김지영'을 보면, 지금 이 시절에도 대학을 나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던 여성이 좋은 남편과 살더라도 자기 자신으로 살기 어려운데. 하물며 40여 년 전 고졸 여성이 결혼한 후 어떻게 자기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겠는가.
결혼할 땐 종교 안에서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종교와 결혼생활은 끊임없이 희생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는, 고삼 때, 어쩌면 더 오래전에 형성된, 나도 모르는 내 인생 각본*때문이다.
종교인. 아내. 엄마로서의 삶은 내가 없는 삶이었다. 잠깐잠깐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 진통제의 약효가 몇 시간 후면 떨어지듯 행복은 잠깐이었고. 고통이 찾아왔다. 영혼을 갈아 넣었는데도. 날이 갈수록 내가 원하던 삶에서 거리가 멀어졌다. 내 모습 또한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비참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알아내야 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심장이 울컥,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종교 안에서 영원히 살기로 작정하고 그렇게 살아왔던 터라, 종교와 나는 엉겨있었다.
예전엔 오락실 입구나 문방구 앞에서 두더지 게임을 할 수 있었다. 두더지를 망치로 내리치면 두더지는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간다. 다시 올라오는 두더지를 망치로 내리친다. 두더지는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듯 하지만 다시 올라온다. 두더지는 구멍 속에 있기를 거부한다. 내려쳐도 내려쳐도 다시 올라오는 두더지 같은 내 꿈. 꾹꾹 눌러도 꿈틀꿈틀 다시 기어 올라왔다.
방송대에 진학한 이유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학교 공부 이외에도 물리, 동식물의 진화, 지구와 우주의 탄생에 대한 책을 읽었다. 유튜브를 시청하면서 철학, 역사, 자기 계발 , 뇌과학, 심리학, 진화심리학을 공부했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고 선택하려면 지식이 필요했고 나를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삶이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살아있는 것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온종일. 날마다 생각했다. 마침내 내가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아냈다. 행복했다.
이십 대에 선택한 것을 죽을 때까지 그대로 고수할 필요가 없다. 이십 대의 나와 육십 대의 나는 완전 다른 사람이니까. 과거의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야 하니까. 종교와 남편에게 기대지 않아도 행복한 나로. 홀로 서기를 하고 있는 나에게. 한 사람이 잘못 살았다고 했다.
그는 나를 일 퍼센트도 모르지만, 아량을 베풀어 일 퍼센트를 알고 있다고 쳐주겠다. 그가 모르는 구십구 퍼센트 내 삶이 있는데. 그가 알고 있는 일 퍼센트의 내 삶이 얼마나 잘못되었길래, 그 사람이 나더러 잘못 살았다고 대놓고 퉁쳤을까.
그 말이 망치가 되어 가슴을 쳤는데. 그 사람은 그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었을 것이다. 종교 안에서 완벽하게 살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내 모든 힘을 다 쏟아부었다. 나 자신을 위해서든 그 무엇을 위해서든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종교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내 마음이 불안한 데다가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삶의 여러 갈래 길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든, 우리가 그 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으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고 선택하겠는가. 난 최선을 다해 살았다. 내가 선택한 길만이 줄 수 있는 기쁨과 고통을 겪었을 뿐이다. 이십 대의 내가 선택한 길은 멀리 돌아서 내게로 가는 길이다.
더 행복하기 위해, 탕자처럼 돌아오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한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 축구가 제일 좋다며. 음악을 하지 말고 축구를 하라는 말과 같다는 것을. 내가 그에게 행복하기 위해서 돌아갈까 말까 조언을 구한 적이 없다. 그는 내가 어떤 것을 할 때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묻지도 않고선 더 행복하기 위해서 돌아오라고 한다. 탕자라고 하며.
나더러 탕자처럼 돌아오라는 사람과 나보고 잘못 살았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나에 대해서 나의 삶과 나의 행복에 대해 판단하고 조언하겠는가.
행동하는 철학자 최진석 교수는 말한다. "경계에 서라"라고. 한 신념이 완성되면, 그 신념을 깨부수고 다시 새로운 신념체계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그 이유는 신념이 완성되면 신념의 틀 속에 갇히게 되고, 신념의 부작용이 나타난다고. 끊임없이 새로운 신념을 만들고 부수고 하면서 나아가야 한다고. 최진석 교수의 말을 빌리면, 내가 너무 오랫동안 한 신념 속에 갇혀서 부작용에 시달린 것이다.
수십 년의 종교 생활은 나를 알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터널 중의 하나였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어떤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좀 알아냈으니 그뿐이다. 나의 행복은 내돈내산이다. 즉 내 능력껏 내가 쓴 인생각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내가 쓴 인생각본을 세상을 마감할 때까지 그대로 살 생각은 없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듯, 내일이나 모레의 내가 오늘의 나와 다를 것이기에. 내일의 나는 내일의 나를 위한 인생각본을 쓸 것이고. 모레의 나는 모레의 나를 위한 인생각본을 쓸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의 나에게 오늘 쓴 인생각본에 맞춰 살라는 건,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를 억압하는 것이다. 오늘의 내가 자유롭게 살기 원하듯 내일과 모레의 나도 자유롭게 살고 싶을 것이다. 오늘 쓴 인생각본의 유효기간은 오늘 하루뿐이다. 내일과 모레의 내가 어제나 오늘의 나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와 같은 각본을 짜도 그건 새로운 각본이다. 내일의 내가 짠 각본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심장이 흔들리는 삶을 살라고 한다. 나의 심장이 흔들리는 삶은 나만의 방식으로 사는 거다. 내가 나로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수십 년을 발버둥 쳐야 했다. 어떤 사람은 쉽게 쉽게 살라하고. 어떤 사람은 재밌게 살라하고. 또 어떤 사람은 도전하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살란 말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나 그렇게 살라하고.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면 된다. 살다가 아니다 싶으면, 그때 또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면 그뿐이다. 다른 사람의 말은 참고용이다. 다른 사람의 잣대를 끌어다 쓰면,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가볍고 홀가분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심장 속에 살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로 인해 가볍고 홀가분하게 살 수 없는데. 그녀가 어디 갈 곳이 없어 내 가슴속에 지금껏 머무르겠는가. 그녀가 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나를 떠나가지 않는지. 이유를 물어봐야겠다. 내가 묻는다고 단박에 대답해 줄 그녀가 아니다. 그녀가 대답해줄 질문 하나를 찾기 위해 나를 던져야 할 수 있다. 나를 던져서라도 찾고 싶은 질문.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대답은 그녀의 몫이니까.
그녀에게 던질 질문을 찾아가는 길에서 그녀에게 던질 질문을 찾지 않고. 내게 질문하고 있다. "너는 왜 그녀를 가슴속에 품고 사는 거니? 그녀를 떠나보낼 때가 되지 않았니?"라고. 그녀를 떠나보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없었다. 그녀가 안 나간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가 나를 박차고 나가 나로 살기 시작하면, 그녀 또한 나를 박차고 나가겠다고 한다. 그땐 내가 아무리 붙잡아도 소용없다고 한다. 나로 서기 위해 심장이 얼마나 더 시큰거려야 할지 모르겠고. 그녀가 떠나간 뒤 홀로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를 떠나보낼 채비를 한다. 내돈내산. 내 능력껏 내가 쓴 각본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인생각본: 교류분석상담에 나오는 용어,
각본은 어린 시절의 결정에 기초하고 있다. 삶의 인생계획은 어린 시절에 결정되며 우리는 거의 무의식 수준에서 이 각본에 따라 살아간다. 이렇게 결정된 행동을 하다가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각본을 분석해서 생활양식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