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하지 않은 일을 잘한다고 해서
그 일이 중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 팀 페리스 -
"여러분은 직장에서 누구를 위해 일하고 계시나요?"
직장에서 우리는 고객과 상사를 모두 만족시켜야 합니다. 고객은 우리가 속한 조직에 직접적인 이익을 가져다주는 존재이고, 상사는 우리의 고과를 매기는 평가자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조직의 성격에 따라 고객지향적인 일과 상사지향적인 일이 서로 상충된다는 점입니다.
보수적인 조직에서는 상사지향적인 사람이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상사가 시킨 일을 그대로 수행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더 크게 인정받죠. 이 경우 고객에 대한 인사이트보다는 상사의 개인적인 기호가, 일의 본질보다는 일의 포장이 더 중요해집니다. 일례로 이전 직장에서 일할 때 연차 높은 어느 대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동기 중에 '칼진급'한 친구가 있는데, 그 비결이 상사의 '검색 기록을 뒤지는 일'이었다고요. 상사가 퇴근하면 PC 검색 기록을 보며 개인적인 취미든, 업무적인 관심사든 파악해서 비위를 맞췄다는 것입니다.
물론 직장 생활도 사회생활인 만큼, 윗사람에게 맞추는 일도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정도가 반드시 '일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수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상사가 어떤 지시를 내리더라도, 그게 고객 만족과 이익 창출이라는 일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면 다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렇지 않고 상사가 지시했다는 이유로 비효율적인 일이라도 무조건 실행해야 한다면, 그 조직은 멍청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느 조직이든 상사지향적으로'만' 일하며 조직을 멍청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들을 '역적'이라고 부릅니다. 조직에 비용적인 손해를 가져오더라도, 주변 사람에게 불필요한 업무를 전가하더라도, 눈앞의 상사만 만족시키겠다는 것은 결국 '내 고과만 잘 받으면 된다'라는 이기주의의 발현이니까요. 안타까운 점은 이런 역적들이 대개 조직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겠죠. 저, 최다남이 집권하면 일단 역적들부터 시원하게 참수하고 시작하겠지만, 보수적인 조직에서 저 같은 사람은 높이 올라가기 어렵다는 게 정말 아쉽습니다.
자, 어쨌든. 저와 여러분은 앞서 직장 생활을 하며 조직 안에서 인정받기보다 개인의 성장에 더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역적들이 득세하는 직장에서 우리는 대체 어떻게 일해야 할까요?
우리는 직장 안에서 전적으로 고객지향적으로만 일할 수도 없고, 전적으로 상사지향적으로만 일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돈을 받고 고용됐기 때문에 부서의 이해관계나 직급의 위계질서 안에서 움직여야 하고, 동시에 우리가 하는 일의 의미를 찾기 위해 내가 하는 일이 고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까지 생각해 봐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고객지향적 관점과 상사지향적 관점 사이에서 비중을 정하는 일이겠죠.
저, 최다남은 이렇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상사가 지시한 일에 대해서는 상사지향적 관점에 비중을 더 두더라도, 우리가 주도해서 하는 일에 대해서는 고객지향적 관점에 비중을 더 두자고요. 중요한 점은 어떤 경우라도 고객지향적 관점을 완전히 잃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객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객 관점에서 고민하고 일을 해봐야지만 우리가 능력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고객관점에서 일하며 제 능력도 기르기 위해 제가 유의하고 있는 세 가지 오류입니다.
1. 용어 사용에 대한 오류
일과 관련된 용어들을 더 높은 차원에서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우리는 마케팅, 기획과 같이 직무에 관련된 용어나 프로모션, HRD과 같이 업무에 관련된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런 용어들을 본래 의미에 맞게 사용하고 있을까요? 예를 들어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마케팅이라고 부르는 일이 실제로 다른 직장이나 고객에게도 정말 마케팅의 의미를 갖는지 묻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하는 일이 이미 어느 정도 형식이 정해진 틀 안에서 작은 첨가물만 덧붙여 실행하는 데 불과하다면, 위에서 지시한 일들에 논리만 만들어 실행하는 데 불과하다면, 이런 일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의 본래 의미에서 벗어난 일들일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평소에 관심 있는 직장의 채용공고나 리멤버 등의 이직 플랫폼에서 관련 용어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속한 유통업에서는 마케팅이라는 용어를 고객 관점에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또 제가 관심 있는 IT업계의 채용공고에서는 마케터에게 어떤 경험과 역량을 요구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죠. 그 다음은 우리가 파악한 용어의 본래 의미와 관련된 일들을 실제로 해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용어를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사용하는 협소한 의미를 넘어 더 높은 차원에서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용어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고객만족과 능력 성장의 정도를 결정합니다.
2. 일하는 명분에 대한 오류
일할 때 본질보다 명분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보고서에 뭐라도 적어 넣으려고, 혹은 그냥 상사가 관심을 가지니까.' 이런 이유로 일하는 것은 단지 눈속임일 뿐입니다. 직장 생활에서 하루하루를 그냥 무사히 넘기기 위해 억지로 명분을 만들어서 하는 '짓'들에 불과하죠.
특히 정량적인 목표가 정해졌을 때 이런 눈속임 현상이 심해집니다. 예를 들어 프로모션 A를 통해 매출 10억을 달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기서 매출 증대는 목적이고, 프로모션 A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이 계획을 가지고 누군가의 성과가 측정되고 고과가 매겨지는 순간, 목적전도 현상이 발생합니다.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하더라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있어도, 기획자 본인의 이익을 위해 억지로 프로모션 A를 진행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눈속임은 역적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제가 '일'이 아니라 '짓'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눈속임이 고객, 자기 자신, 조직 모두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민과 열정의 부족함을 숨기고 인정받기 위해 가장 편리해 보이는 방법을 택한 눈속임들이 쌓이고 쌓이면, 어느새 눈앞에는 대체 이걸 대체 왜 해야 하는지 모를 뻘짓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결코 눈속임으로 일해서는 안 됩니다. 상사가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설혹 상사의 눈밖에 나서 고과를 잘 받지 못하더라도, 조용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는 일을 해야 합니다. 고객지향적이면서 실질적인 능력도 기를 수 있는 일 말입니다. 역적들과 달리, 우리 목표는 만사 다 제쳐두고 상사만 만족시키는 게 아니니까요.
3. 일을 잘한다는 착각의 오류
루틴한 일을 잘한다고 해서 정말로 일을 잘한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일을 하다 보면 업무에 필요한 사내 전산이나 일 처리 절차 등에 대해 익숙해지는 시기가 옵니다. 이 즈음이면 어렵지 않게 일을 처리하는 자신을 보며 '내가 일을 좀 잘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합니다. 루틴한 업무를 잘 처리하는 것은 일을 잘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적응을 잘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요.
제 관점에서 진짜 일을 잘하는 사람은 인사이트와 실행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고객과 시장에 대해 나만의 인사이트가 있고, 그 인사이트를 기반으로 일을 실행해서 결과까지 도출해낼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일을 잘하는 사람이죠. 중요한 것은 향후 AI도 대체할 수 있는 형식적이고 루틴한 일들을 능숙히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나만의 인사이트를 얻고, 그 인사이트로 어떤 경험과 역량을 쌓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입니다.
쓰다 보니 조직에서는 저 같은 사람을 굉장히 싫어할 것 같네요. 저 같은 사람을 뭐라고 부를까요. MZ?
그런데 저는 조직에 불만이 있거나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라기보다, 그냥 제가 속한 조직보다 더 높은 차원에 존재하려는 사람일 뿐입니다. 상사를 위해 일하면 지금 내가 속한 조직에서만 일을 잘할 수 있지만, 고객을 위해 일하면 어느 조직에서든 일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나아가 언젠가는 최선을 다하는 남자라는 이름을 걸고 제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