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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도 배도 아닌 것이

제 6화: 나는 집이 두 채나 있다

by 문 내열

한국에 나와 살면서 티브이 뉴스를 미국에서 보다 몇 배나 더 자주 보는 것 같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거의 매일 부동산에 관한 뉴스다. 한국에 부동산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연일 쏟아지는 부동산 뉴스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츠려든다. "정말 큰일이네" 하며 한숨을 쉬고 있다. 마치 실시간으로 부동산에 대한 중계를 보고 있는 듯하다.


성동구는 일주일 만에 일억 오천이 올랐다.

이러다가 영영 내 집을 장만하지 못하는 거 아니야?

사람들은 모두 움직이고 있는데 나만 이렇게 차분하게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는 알듯하다. 사람들이 왜 그토록 부동산에 집착하는지를. 이런 상황에서 남들이야 어떠하든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넓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됐어” 하고 초연해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살고 있는 집값을 다른 지역에서 날뛰고 있는 집값과 비교하면 상대적 박탈감에 분을 삵이지 못하게 될 것 같다. 그뿐인가 강남 3구의 집값이 여과 없이 티브이 스크린에 나온다. 매매 50억, 전세 30억.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이 5억 이라치면 50억짜리 월세 보증금에도 미치지 못하다니------. 혼자서 중얼거릴 거다

빌어먹을-------

이게 사람 사는 집인가?

거지가 돼가는 기분이야


집값이 날뛰어도, 투기가 기승을 부린다 할지라도 부동산 사장의 동향을 알아보려고 인터넷을 뒤지는 사람들이나 알 수 있도록 제발 조용히 살았으면 좋겠다.


뉴스는 연일 편법과 불법으로 집을 사고파는 방법도 있다고 떠들어대고 있다.

갭투자

영끌족

집값담합

다운 계약서


왜 선동적인 표현을 자제하지 않고 사람들을 자극할까? 그것도 9시 프라임타임에--------


미국에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지은 지 70년이 다되어가고 있다. 전 주인이 분양을 받아 40년을 살다 저 세상으로 떠났고 뒤이어 내가 30연째 살고 있다. 집은 가정이 머무는 곳이다. 집안 곳곳엔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어있고 엄마 아빠의 따뜻한 사랑이 숨 쉬고 있는 곳이다. 벗어나면 그립고, 힘들고 외로우면 찾아가고 싶은 곳이 집이다. 집이 때로는 엄마의 대명사로도 불린다. 언제나 포근하고 편안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큰아들방과 작은아들방은 그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떠난 그대로이다. 초등학교 시절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그랜드캐년 여행길에 찍었던 사진, 지금은 누군가의 와이프가 되어있을 고등학교 프롬파티에서 찍은 여자친구의 사진들이 진열되어 있다. 아들들이 집을 찾을 때마다 그들은 그 옛날 사진들을 쳐다보며 “그때가 좋았지, 친구들은 지금 어데서 무엇하고 있을까? ” 하며 옛 추억을 곱씹어볼 것이다. 옛 추억들을 소환해 주는 곳이 집이다.


이런 집이 지금 한국에서는 상대의 부를 재단하는 도구가 돼 있으니 안타깝다. 누군가를 만나면

어디에 사세요?

무슨 아파트여요?

몇 평이에요?

하고 묻는다.


미국에도 돈 많은 부자들이 사는 “베버리힐, 말리부, 뉴포트비치” 와 같은 동네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만나면 비싼 집에 산다고 하지 않는다. beautiful town 이라고 한다. 둘러보면 정말이지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경관과 집들이다. 우리는 이런 동네에서 살아보는 게 꿈이나 희망이지 기어코 비집고 들어가 살아보겠다고 도전 하지는 않는다. 있는 자들이 갖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질투도 하지 않는다. 왜? 나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하니까.


나는 집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집. 다른 하나는 한국에 있는 추억 속의 집이다. 추억 속에 그 집에는 대문 앞에 2008 호라는 숫자 대신 우리 집 가장인 아버지 이름이 새겨진 명패가 걸려있었다. 여기가 문 ㅂㅊ네 집입니다. 이 명패가 내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들락거리는 이웃들을 맞이하고 배웅도 하였다. 추억 속에 집은 초등학교까지 4 km의 거리에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교과서를 가방이나 백팩대신 보자기에 싸서 등에 매고 다녔다. 학교 정문 앞에는 푸른 기와지붕의 조그마한 가게가 있었다. 나는 거의 매일 그곳에 들러 하얀 색깔의 구슬처럼 생긴 십리오다마라는 캔디를 사서 입에 머금고 걸어오면 우리 집에 다다를 즈음에야 다 녹아 없어진다. 그래서 십리오다마라고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봄이 오면 우리 집으로 가는 길에는 벚꽃이 흩날리고 산비탈에는 유채꽃이 장관을 이루곤 했다. 가을에는 코스모스 꽃이 피고 그 꽃 속에 잠자리가 사뿐히 내려앉으면 나는 작년에 봤던 그 잠자리가 다시 찾아오는 줄 알았다. 크기와 모양새가 기억 속에 그 잠자리와 너무 똑같았기 때문이다. 추억 속에 그 집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낭만과 마음의 여유를 키워 주었던 게 아닌가 싶다.


집에 들어서면서 “어머니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하고 소리치면 어머니는

“내 새끼 잘 다녀 왔는가?" 하고 반기면서 온기가 가시지 않은 삶은 고구마를 놋그릇에 담아 동치미 국물과 함께 꺼내 주셨다. 지금도 그 집에 가면 어머니께서 문을 박차고 맨발로 뛰쳐나와 반기면서 내 얼굴을 그녀의 가슴으로 감싸줄 것만 같다. 그립다. 추억 속에 그 집. 가보고 싶다 내 흔적이 남아있는그 집. 어머니가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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