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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 내열 Dec 08. 2021

당신이 조심스러워요

내가 우리 집에 이방인 이었구나

일에 지치고, 사람에 시달렸던 세월을 뒤로하고 가정으로 돌아온 어느 은퇴자 그이의 이름은 토마스.

요란한 알람 소리에 눈을 비비며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세울 필요도 없고  이제는 이내 몸이 그 정도면 됐으니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잠도 실컷 자고 싶다.

아침저녁으로 우리 집 귀염둥이 진돗개 맥스와 운동도 하며 엉망이 된 몸도 추스르면서 아내와 함께 부엌에서 요리도 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고 싶다. 수학여행을 기다리는 국민학생 같이 설레고 신바람이 난 토마스.  가정으로 돌아온 첫날. 아내가


여보야,  쓰레기 좀 버려줄 레?

예 마님, 하명만 하세요


토마스는 아내가 분리해서 담아놓은 비닐봉지를 들고나가서 버리고 온다.


여보, 하나는 일반 쓰레기이고 다른 하나는 재활 쓰레기인 것을 확인하고 버렸지요?

아니,

가서 구분해서 다시 버리고 오세요.

됐다. 괜찮다.

여보, 첫날이라 오늘은 내가 구분해서 다시 버리고 올 터이니 다음부터는 유념하세요?

알았다.

 

버렸으면 됐지 그것을 뒤져서 다시 버릴 필요는 없지 않아?” 하고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을 아내가 엿들었다.

그래도 첫날이라 아내는 못 듣는 척하고 지나친다.


이후 두 부부는 뒤뜰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남편이 고생했던 그동안의 공중전, 해상전 등을 회상하며 칭찬 일색이다. 이에 토마스는 아내에게


여보야,

이제 밥 짓는 방법,

세탁기 돌리는 방법

설거지하는 방법도

배워서 당신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다오.


아이고, 나 감동 먹었다.

여보, 나 뽀뽀 한번 해줄레?


토마스는 저녁을 아내와 함께 하면서


설거지는 내가 해볼까?

여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세요. 당신에게 있는 것은 시간뿐인데

아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 돼 간다는 게 신기 하기만 하오..

그럼 당신이 원 한다면 그렇게 하시구려


토마스는 밥그릇과 반찬 접시들을 부엌으로 옮기더니 먹다 남은 반찬과 찌개를 싱크대에 쏟아부어 버린다. 이를 지켜본 아내는


여보, 지금 뭐 하는 거요?

와? 잔반 버렸다

그걸 버리면 어떡하오?

뭐라고?  이걸 뒀다 또 먹는단 말이오?

이 양반이 달나라에서 오셨나? 왜 이래?

내가 오히려 놀랍다. 나를 여태껏 이렇게 먹였다고?


물을 이렇게 계속 틀어놓고 있으면 어떡하오?

왜 물세가 걱정되나?

물세도 물세지만 이것도 자연을 보호하는 방법 중의 하나지요.

나는 당신이 이토록 환경에 신경 쓰고 사는 줄 몰랐다.

참, 주부라는 게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인 줄 알아요? 우습게 보지 마세요..

토마스는 설거지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 “내가 기대했던 건 이게 아닌데?”

마음을 추스르고 나온 토마스는

정원에 나뭇가지 치기를 해야겠다고 하니 아내가


그러면 고맙지요

그럼 나는 마켓에 가서 오늘 점심 준비를 해 오리다


토마스는 아보카도 나무와 레몬 나무들이 관리가 안돼 위로, 옆으로 너무 지저분하게 자라고 있다고 판단 산뜻하고 홀가분하게 가지치기를 해 버렸다. 역시 이 집도 내 손을 거처야만 관리가 된다면서 매우 흐뭇해한다. 은근히 아내로부터 칭찬도 기대하고 있다. 마켓에서 돌아온 아내는 심하게 가지치기를 해버린 과일나무를 보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마켓 봉투를 땅에 떨어 뜨리면서


토마스, 당신 왜 이러시나?

왜? 멋지지 않나요? 정원수는 이 정도 키로 관리해야 하는 거예요

내가 못 살아!!!!  내일 모레면 꽃봉오리가 올라 올터인데 이를 어쩐담. 누가 당신더러 과실수 가지치기를 해달라고 했어요? 담장 밑에 잡목 정리나하고 풀을 뽑으랬지


뭐야, 어제, 오늘 겨우 이틀 지났는데 뭐가 이렇게 꼬이지?  쓰레기 버리기, 설거지, 과실수 가지치기로 당황한 토마스는  혼자서 조용히 산책 겸 운동삼아 걸어본다.


이게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인가?

아니지

지난 수십 년간 내가 살아왔던 집이고

아내와 소통도 잘됐고

주위 친구들도 우리 부부를 부러워했었는데


토마스는 자신에게 조금은 실망했다. 두 부부가 함께 하면서 매일 아니 매시간 화기애애하고 웃음꽃으로만 살 줄 알았는데 뭔가 뜻하지 않게 흘러가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래도 함께 살아왔고 앞으로도 함께 해야 할 부부인데 내가 아내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겠노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토마스, 내가 세탁하는 요령을 알려줄까?

어디 한번 해보지

먼저 옷을 색깔별로 분리하세요. 그리고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는 옷가지는 세탁소로 가져가야 합니다

나도 그 정도는 생각이 있는 사람 이요

그럼요, 당신이 누구신데. 회사 사장님 이셨잖아요.

자 빨랫감을 기계 있는 곳으로 옮깁시다


아내는 세탁기 작동요령과 무슨 세제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꼼꼼하게 설명해준다.

됐다. 그 정도면 나도 할 수 있다


아내는 작업 중인 그림을 계속하기 위해 냉큼 그녀의 화실로 들어가고 토마스는 세탁기가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아내로부터 추가 점수라도 받아 보겠다고 커피를 만들 계획이다. 캐비닛 이곳저곳을 뒤져 커피를 찾다 보니


뜯어진 커피 봉투가 2개

오픈된 커피 통이 2개

다양한 향의 커피라면 이해할 수 있으련만 같은 종류의 커피를 이토록 마구잡이로 뜯어놓고 낭비를 한다고 생각하니 실망스럽다


여보. 커피 대령이요

고마워요 토마스 씨

그런데 무분별하게 커피봉지와 커피통을 뜯어놓고 사용하면 되겠어요?

그건 내 영역이니 당신은 상관 말고 내가 시키는 것이나 잘하세요

듣자 하니 당신 말씀이 지나치신대요.. 내 영역? 시키는 대로?

됐어요. 나가 보세요

됐어요? 나가 보세요?

아니? 커피를 그렇게 오픈해놓고 당신 뻔뻔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아내가 눈을 부릅뜨고 버럭 화를 내면서

당신에게는 내가 그런 수준의 여자로 보여요?

친구가 먼 곳으로 이사 간다면서 이미 오픈된 커피 봉투와 커피통을 각각 하나씩 주고 가서 그렇게 된 거예요

토마스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를 황급히 빠져나와 버렸다.


“아 옛날이여

지난시절 다시 돌아올 수 없나 그날”

이 선희 씨의 노래를 읊조리고 있다.


그래 맞아 지난 40 연간 아내가 독차지했던 영역을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침범을 했군. 나는 아무거나 되는 대로 도와주면 그녀가 기뻐할 줄만 알았는데 내 생각이 짧았다.

아니, 아내가 하는 일을 과소평가했어.  집안일도 계획이 있고, 순서가 있고, 방법이 있을진대 이방인이 들어와 헤집고 다니니 그녀를 화나게 하고, 실망시킬 수밖에

"여보야, 다시 보니 당신이 조심스러워"

" 토마스, 무슨 소리야 여기는 당신의 보금자리 야,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즐기기만 하소서. 당신 곁에는 내가 있잖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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