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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 내열 Jun 23. 2022

나를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제1화: 반 지하 셋방살이에서 상계동 주공 19평 집주인으로

결혼 후 어렵사리 장만한 집 한 채를 날려먹고 45살이 될 때까지 월세살이를 하였습니다. 산다는 게 너무 막막하여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퇴직금 7만 불 중 4만 불이 소진되고 나니 전 가족이 길거리로 내몰릴 것만 같아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먹고사는데 돈벌이가 된다기에 자동차 정비 관련 학원을 다녀 자격증을 따고 비즈니스를  일궈낸 이민생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모님이 농사를 지어 아들 셋을 대학까지 뒷바라지하셨으니 나름 부농인 셈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서둘러했기에 부모님의 도움으로 전세를 얻어 새 출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모님이 주셨던 전세금을 2년 만에 돌려 드리고 그라운드 제로에서 시작하려 한다.  와이프 왈 “문 씨 가문에 효자” 났대요.


결혼 10년 만에 상계동 주공 19평 아파트를 장만하고 회사에서는 직급이 대리 그리고 와이프와 함께 두 아들을 키우면서 산다는 게 내 딴에는 그런대로 살만했다. 결혼 후 구의동 단칸방, 자양동 반지하, 가락동 시영 아파트 1층 13평에서 상계동 주공 아파트 15층 19평으로 이사했으니 애벌레에서 나방으로 진화했다고나 할까?


반지하에서 살면서

"여보 조금만 참고 기다려다오! 이래 봬도 나에게는 꿈과 희망이 있소"

글쎄 그녀는 이 말을 믿었을까? 아니면 "내가 선택한 운명인데 누구를 탓하겠소" 했을까?

"지금은 비록 반지하 인생이지만 머지않아 지상으로 올라갈 것이고 그다음에는 공중으로 부양할 거요" 어쩌면 사기꾼들 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조금은 과장된 허세는 아닐는지.


그러나 꿈을 먹고사는 한 젊은이는 돈이 없는 가난이 결코 창피하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까짓 것 (돈?) 벌면 되니까.


가락 시영 아파트로 이사하던 날 "여보 드디어 지상으로 올라왔소이다"

가락 시영에서 상계동 주공 15층으로 이사하던 날 "이게 지상에서 공중으로 부양하는 거요"

조금씩 나아지는 생활은 계단을 오르는 기분이었다.  오를수록 전망도 좋아 보이고 뒤를 내려다보면 "내가 이렇게도 많이 올라왔어?"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람 사는 재미와 성취감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남들은 잠실에서, 서초동에서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에서 산다지만 나는 개의치 않아요. 이 기분은 돈으로 계산이 안되니까


그러나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여유 있게 살았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 그녀는 눈먼 사랑에  그만 똥 밟은 신세가 되어 친구들로부터 연민을 받았다니 그 상처는 오죽했을까? 가련하기도 하고,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순진해 보이기도 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그녀는 내 사랑의 덫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는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애가 둘이나 달렸으니 이제는 "그대는 나의 운명"으로 살 수밖에. 아들들은 책상이 없어 밥상을 대용으로 사용하고 와이프 친구가 가구를 새로이 들였다면서 쓰던 침대를 주면 그곳을 물려받아 사용해야 하는 그녀는 이제 자존심이란 남의 것이 돼 버린 지 오래다.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큰 아들 녀석이 달리기를 했는데 학년에서 일등을 했다면서 우리 아들은 그 흔한 보행기도 사주지 못하고 걸음마를 했어도 달리기만 잘한다면서 나름대로 자긍심을 갖기 시작하니 나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그러다  좋게도 직장에서 미국지사 발령을 받았다. 6년이라는  공백기에 재산을 어떻게 증식을 할까 고민하던 차에 친구가 인천 백화점 분양에 투자한다기에 찾아가 “혼자  먹고 잘살지 말고 나도 한몫 끼워 달라”고 통사정하여 상계동에 살던 아파트를 팔아 백화점 점포 분양을 신청했다. 친구 말에 의하면 6 후에 미국지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당신은  걱정 않고 직장생활을   있다나?  살다 보니  앞에 꽃길이 열리는 듯싶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드디어 그녀 앞에서도  어깨가 제법 으쓱해진다.  가족이 미국으로 떠나던  비행기 안에서 

“여보야, 미국 가거든 급여도 꽤 많이 준다는데 한 푼도 저축하지 말고 여한이 없도록 실컷 즐기기만 하소서. 그동안 당신이 고생했던 것을 조금 이나마 보상해주고 싶은 생각뿐이오”


자동차도 마국산으로 제일  차를 사서 주말이나 휴가를 받으면 마국 서부 해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녀도 보고. 지금이야 골프인구가 많이 늘었지만 그때만 해도 대기업 고위 간부급이나 치던 골프를 미국 와서 바로 시작했으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지하에서 셋방살이하던 내가 하루아침에 출세라도  기분이다. 남은 인생도  상태에서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다 한국을 떠난     정도 됐을  한국에 투자했던 백화점도 대박이란다. 개장하자마자 손님  인기몰이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행복도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년이 지났을까? 친구로부터 “백화점이 부도가 났다 연락을 받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더니 걱정 말란다. 다른 대형 백화점이 인수 의향을 보이기도 하고 자체적으로 대책팀을 구성하여 운영을 하고 있으니  걱정 말고  지내다 나중에 한국에 들어와서 보잔다. 오늘 하루하루가 너무 좋다 보니 “나중에 어떻게 돼겠지하는 막연한 생각과 “친구가 무슨 대책이 있어 나더러 걱정 말고 들어오라했겠지 하고 친구를 믿고 싶었다.


6년이라는 근무기간이 끝나 본사로 귀대하라는 인사 명령을 받고 가족을 뒤로한  혼자 서울에 들어가 우선 거처를 찾는데 친구가 현금이 얼마나 있냐고 묻기에 전무하다고 했더니만 "그럼 월세를 구해야겠군". 친구의 걱정 말고 들어 오라는 얘기는 "바로 월세였다.” 나이 43  자신을 책임지지 못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하고 자책을 하면서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구와 함께 찾은 월세는 2 단독주택인데 주인은 2층에서 살고 나는 1 손바닥 만한   개짜리 였다. 태평양을 건너오고 있는 이삿짐을 생각하니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왜냐면 살림살이가 너무 많아  3칸에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밤마다 기도했다. 제발 태풍이라도 불어 이삿짐이 바다에 빠져서 보험금이라도  먹게  달라고.


6년 만에 서울 본사로 돌아오니 직급도 팀 매니저다.  낯에는 20여 명이나 되는 직원들 상사요 마국서 근무하고 온 미국통이라는 주위의 부러운 시선은 콧대를 세우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손바닥 만한 월세방으로 기어 들어가는 초라한 꼴은 다른 사람이 돼 버린다. 팀원들은 속내도 모르고 팀장님  집에는 언제 초대할 거냐고 물으면

“글쎄 언젠가는 초대해야겠지?” 가 전부다.


화려함과(낯) 초라함이(밤) 병존하는 서울 에서의 생활은 IMF라는 국가부도로 나에게는 결단의 계기가 됐다.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퇴근하여 아내에게

“여보야 오늘 사표 내고 왔어요”

그녀는 무엇에라도 얻어맞은 듯 한참이나 멍하니 나를 쳐다보더니만

“그래 앞으로 대책은 있어요?”

아니요, 이제 생각해봐야겠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여태껏 먹여 살렸으니 앞으로도 내가 책임지면 되잖아요.” 글쎄 자식이 둘이나 달려있는 가족인데 와이프와 상의 한마디 없이 사표 내고 와서 당당하게 통보를 하니 그녀는 나의 당돌함에    충격을 받고도 남을만했다. 이런  용감이라고 해야 하나 무모하다고 해야 하나? 퇴직금 7 불을 수중에 쥐고 다시금  가족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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