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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 내열 Aug 10. 2021

출장 중에 있었던 짜릿한 경험

나는 한국에 있는 대기업  K회사 해외영업 부서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하다가 지금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해외영업부서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해외출장을 심심찮게 다녔는데 충장 중에 있었던 짜릿한 경험 두 개를 소개하고 싶다. 



시간이 꽤 지난 1987년으로 기억된다. 

미국 출장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스케줄은 L.A. 지사를 거쳐 New York 지사를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미국 MBA를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어 회사직원 서너 명이 미국 내  괜찮은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중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김 군이 어떻게 나의 출장 계획을 알고  L.A. 에서 New York으로 이동 중 자기네 집을 방문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다. 티켓팅은 L.A. - Cleveland -New York으로 해오면 김 군이 클리블랜드 공항에서 나를 픽업해 주겠단다.  


당시에는 핸드폰이나 인터넷이 없었고  서류를 타자기로 작성하는 그야말로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이었기에 나는 여행사에 최종 목적지만 얘기해 주면 여행사에서 비행기 routing을 해주곤 했다.  글리블랜드 공항에서 김 군을 만나 집으로 가는데 꽤 오랜 시간 운전을 하기에 알고 보니 김 군의 집은 공항 근교가 아니라 두 시간이나  운전해야 하는 오하이오 주에 있는 콜럼버스 시였다.


오랜만에 만나 회사 얘기, 가족 얘기, 학교생활 등 이런저런 얘기 끝에 김 군이 뉴욕으로 가는 나의 비행기 티켓에 대해 물었다.. 내일 아침 6시 30분 우리가 오늘 만났던 클리블랜드 공항 출발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이곳 콜럼버스 공항 출발로 해야지 두 시간 동안 운전을 해야 하는 클리블랜드 공항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거기까지 운전을 해서 데려다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공사에 전화해서 출발지 변경을 시도하기로 했다.

미국에 먼저 와서 유학을 하고 있는 김 군이 더덕 거리는 영어로 한참이나 통화를 하더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면서 전화기를 나에게 건네주며 나더러 얘기해 보란다. 유학생이나 해외영업 부문에서 근무하는 나나 영어 말하기와  듣기 실력은 도토리 키재기 수준 일진대 나라고 별반 다를 리가 없었다. 전화에만 의존했던 당시에는 항공사 직원들과 통화를 하면 폭주하는 고객의 전화 문의에  그들의 응대는 말 그대로 따발총이다. 거기에다 무슨 말을 한마디만 덧 붙이면 돌아오는 그들의 답은 따따발총 이다.  물론 영어가 미숙하오니 천천히 또박또박 얘기해달라고 부탁했지만 크게 다르지 않은 같은 급의 따발총이다. 결국은 포기를 하고 다음날 아침 공항에 가서 콜럼버스 발 뉴욕행 비행기표를 새로이 사고 한국에서 가져온 표는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환불을 받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동이 트기 전 어두운 공항 길을 운전하고 가면서 나는 김 군의 옆자리에 앉아 지도를 펼쳐놓고 

"이번에 나오는 길에서는 우회전, 다음 길에서는 좌회전"

하며 공항을 찾았다. 눈과 입은 마치 현대판 GPS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지만 내 머릿속은 공항 카운터에 가서 어떻게 하면 가장 짧고 명료하게 영어를 해야 하나 계속 궁리하며  새벽길을 달리고 있었다. 이윽고 공항에 도착하였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김 군은 뒷전으로 물러서며 나더러 카운터에 가서 티켓팅을 해보라는 것이다. 나는 티켓을 새로이 구매하는 대신 한국에서 가져온 티켓을 꺼내 보이면서 

“Can I fly to New York with this ticket?  이 티켓으로 뉴욕을 가고 싶은데요"

 라고 했더니 직원이 티켓을 보더니만 기다려 보라고 하면서 안으로 들어간다. 시간이 3-4분 흘렀을까? 긴장하다 보니 꽤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다시 카운터로 나오기에  

"How’s going on? 어떻게 돼 가고 있어요?"

라고 물으니 좀 더 기다려 보라고 한다. 다시금 3-4분이 지났을까? 이번에는 내가 건네줬던 티켓 외에 다른 서류를 들고 나오더니만 내가 뉴욕으로 가는 보딩패르스라며 건네준다. 한국에서 가져온 티켓으로 routing을 다시 했다면서 콜럼버스에서 뉴욕행 비행기 값을 제외하고도 받을 금액이 남아 있으니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환불을 받으라나

awesome! 신난다.


김 군과 헤어지고 나서 탑승구로 갔더니만 최우선으로 보딩을 하라는 것이다. 기내 앞에서 기다리던 승무원은 나를 좌석으로 안내해 주고, 재킷을 받아 캐비닛에 걸어준다. 그뿐인가 자리에 앉자마자 서너 종류의 음료수를 들고 와 권한다. 다른 승객들은 아직도 보딩 중이다. 난생처음 받아본 극진한 친절과 과분한 접대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니 일등석 좌석에 앉아 있는 것이다. 하마터면 새로이 티켓을 사서 뉴욕을 갈 뻔했는데 한국에서 가져온 비행기  티켓을 rerouting 했더니만 이렇게 멋진 출장을 즐기다니 

역시 내 영어 괜찮았어

 

흔히들 이런 상황에서는 서두가 길다. 이를테면 “내가 한국에서 출장나온 사람인데 원래 출발지는  클리블랜드였고 여차여차한 사정으로 이곳 콜럼버스 공항으로 바꿔 여행하고 싶다” 고 짧은 영어로 설명하자면 쉽지는 않다. 우리 모두는 영어를 잘할 수 있다. 다만 화법이 귀납법으로 다소 설명이 길다 보니 영어로 소통하는 데에 약간 문제가 있을 뿐이다. 서구사회에서는 본론을 맨 먼저 꺼내야 한다.  연역법이다.  상대방이 이해가 안 되면 질문을 하거나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이 연역법이 잘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연역법으로 대화를 해보면 돌아온 답이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말이요?”

“자초지종을 애기해 보시요”다. 

지금도 이따금씩 “Can I fly to New York with this ticket? 이 한마디로 멋진 출장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일 년 후에 다시 미국으로 출장을 갔는데 이번에는 우리 제품에 대한 National Show 전국단위의 쇼에 본사 요원으로 참석차 시카고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실 나는 미국지사에서 근무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이유는 다른 해외지사는 거래선으로부터 수주를 받아 본사에 연결해 주는 연락 사무소와 같은 단순기능이지만 미국지사는 법인으로 현지에서 (세일즈맨과 재고를 확보해 놓고) 마케팅을 하는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의 십 년을 기다렸는데도 기회가 오질 않는다. 당시 회사는 해외에 십여 군데 지사를 두고 본사에서 필요 요원을 차출 5-6년씩 파견근무를 시켰다. 그리고 근무기간이 끝나면 그 인원을 교체해 주는 “해외지사 발령”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아마 지금도 이런 제도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기업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회사에서는 저에게 캐나다, 호주지사를 권했지만 사양을 하고 미국지사 파견근무 기회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미국지사에 파견돼 있는 그 면면을 보면 모두가 현대판 금수저 들로 진용이 꾸려져 있었다.  어떤 이는 부모가 대법관 출신, 장군 출신, 국회의원, 아니면 친인척이 회사 오너들과 친분관계가 있다.  농부의 아들 흑수저 가 목메고 있는 미국지사 발령의 꿈은 야무지기도 했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씩 미국으로 출장을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미국지사 발령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갖게 해줬다.


그 쟁쟁한 멤버들과 쇼 참석차 시간을 함께 하면서 시카고에서 있었던 일이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자 

“여보게 미스터 문, 한국식당을 찾아보지? 미국지사에 나올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보자꾸나”

나는 순간 섬광처럼 번뜩이는 지혜가 필요했다. 비록 농담 삼아 내뱉은 말 일지언정 그래도 순발력이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었고 대신 호텔에는 두꺼운 전화번호부책 두 권이 항시 비치되어 있었다. 하나는 인명 번호부, 다른 하나는 비즈니스 번호부 였다. 먼저 비즈니스 번호부에서 한국식당이 있는지를 확인해 보았으나 눈에 뜨이지 않았다. 다시금 인명 번호부에서 김. 이. 박 을 찾아 그중 한 곳에 전화를 했더니 6-7살 정도 예상되는 어린이가 전화를 받는다. 

“You have anybody there who speaks Korean?” 거기에 한국말하시는 분 계세요?"

라고 물었더니 

“Hold on” 기다려 보라는 것이다. 

마침내 부모가 나오기에

“시카고에서 한국식당을 찾고 있다고”

했더니 두 군데가 있는데 하나는 시내에 있으나 너무 비좁고, 다른 하나는 다소 외곽에 위치해 있지만 깨끗하고 규모가 있는 식당이란다. 식당이름과 전화번호를 받아 적고나서

“I got it” 드디어 찾았지요"

“자 가시지요?”

라고 했더니만 

“미스터 문, 미국지사에 나와도 되겠구먼”


일 년 후 1990년 가을에 꿈에 그리던 미국지사 발령을 받고 온 가족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가슴이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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