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편안하게 하는 것과 불편하게 하는 것들
평온함에 이르는 가장 쉬운 방법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평온함과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전교에서 중위권의 고만고만한 성적을 받는 학생이 어느 날 사실은 전교 1등이 되는 특별한 비법이 있다며 나대는 것만 같아 마음 한켠이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평온함에 이르는 가장 쉬운 방법을 생각해 보면 정말 쉽다.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의 빈도를 높이거나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의 빈도를 줄이는 것이다. 무엇이 더 쉬울까? 일단 돌이켜본다. 나는 무엇에 편안함을 느끼고 무엇에서 불편함을 느낄까.
먼저 하루 안에서 편안한 순간들을 찾아내본다. 알람 소리가 울리기 전에 스스로 일어났다는 걸 깨달았을 때, 즐겨 입는 데님바지가 아직 널널하다고 느낄 때(슬프게도 요즘은 널널하지 않아서 더 널널한 바지를 질렀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고요한 사무실에 놓여질 때, 통화하고 싶은 상대와 연결음 없이 통화가 바로 연결될 때, 일하다가 잠시 올라간 옥상에서 별생각 없이 하늘을 올려다볼 때, 그 하늘을 올려다보며 언젠가 다가올 평화로운 죽음을 상상할 때, 화장실에 갔는데 아무도 없을 때.
이번엔 하루 안에서 불편한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끝난 줄 알았던 알람이 다시 울릴 때(그것도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로. 더 끔찍하게는 핸드폰을 밖에 두고 욕실에 들어와서 몇 분 동안 꼼짝없이 알람을 들어야 하는 상황도 있다), 즐겨 입는 또 다른 데님바지가 엄마 손에 세탁된 이후로 작아졌다는 걸 깨달았을 때(엄마 데님바지 빨지 말라고 했잖아), 말 섞고 싶지 않은 사람이 제일 먼저 출근해 있을 때(제발 말 걸지 마라 말 걸지 마라), 통화하고 싶은 상대와 하루종일 통화가 되지 않을 때(내 참을성을 시험해보고 싶은 하늘의 뜻인가), 일하다가 잠시 올라간 옥상이 무더워서 못 견디겠을 때(잠시 앉아서 쉴 요량이었는데 불지옥에 앉아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화장실에 갔는데 북적거려서 눈치를 보며 자리를 옮겨 다닐 때(저 사람 양치 끝나면 손 씻어야지). 반면 이런 순간들도 있다. '결혼은 꼭 해야 한다', '아기는 꼭 낳아야 한다' 따위의 소리를 들을 때, '만나는 사람 있어?'가 아닌 '남자친구 있어?'라는 질문을 건너 들을 때, 내 책상 서랍을 말도 없이 멋대로 여닫는 상사의 모습을 목격할 때 등등.
이 정도 쓰면서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나에게는 편안한 순간보다 불편한 순간이 훠얼씬 많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내가 모르는 사이 편안한 순간과 불편한 순간이 일대일로 찾아오고 있었을지 모른다. 다만 불편한 순간을 훨씬 더 잘 캐치하는 능력을 가진, 이 세상의 수많은 불편러 중 한 명일 뿐이다. 인정할 건 인정했다. 그럼 이제 불편한 순간을 느끼는 빈도를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가장 쉬운 방법은 상황이나 상대방을 이해해 보는 것이다. 근데 이마저도 쉽지 않다. 상황이고 상대방이고 이해는 개뿔 지금 내가 화가 나고 불편한데 뭣이 어떻고 저떻냐는 말이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게 또 참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단 하루라도 평온함에 이른 사람이 되고 싶다면, 모든 불편한 상황들을 흘려보내는 방법뿐이다. 예전에 다니던 요가학원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불편한 마음을 작은 유리병 안에 넣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 유리병을 마개로 꼬옥 닫고 넓디넓은 바다 위에 띄운다고 생각해 보는 거예요. 그러면 파도를 따라 유유히 흘러가겠죠. 불편한 마음을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둬 보세요."
오늘도 나는 유리병에 차곡차곡 불편함의 조각들을 가득 채웠다. 비집고 나오는 것들을 애써 넣고 마개를 닫느라 고생을 좀 했지만. 그리고 띄워 보내본다. 내일의 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