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우울 장애로 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한 지도 이제 곧 1년 반. 단순한 우울보다는 조울에 가깝다 생각할 때가 더 많다. 실제로 양극성이 의심되는 우울이라고 의사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도 했고.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은 첨예한 전쟁통 속에서도 "이기리라" 비장하게 외쳐보는 전투력 모드부터 저녁이라는 것을 위에 채운 후 잠들기 전까지 아무것도 할 게 없어 방황하는 불안 모드까지. 하루에도 이런 롤러코스터를 몇 번씩이나 타니 말이다.
나의 우울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 근원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곤 한다. 원인을 몇 가지 추측해본다. 첫째,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하지만 그렇기엔,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직장인과 다를 바가 없는데. 늘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요상하다. 둘째, 하고 싶은 게 없어서. 음, 이건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탈이니까. 오, 그렇다면 셋째,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막상 이렇게 쓰고 보니 어디 한데 퍽 맞은 듯 타자를 잠시 멈추었다. 정답인가 보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건 아니다. <타이탄의 도구들>을 읽고 매일 아침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으며, 오전 8시 30분에서 오전 10시 사이에는 무조건 회사에 도착할 수 있도록 출근을 한다. 점심은 매일 다른 것으로, 기왕이면 맛있고 배부른 것으로 골라 먹고 있으며 마음이 아주 잘 맞는 동료들과 치열하게 이야기 나누며 하루를 보낸다. 자기효능감이라는 게 무엇인지 똑똑히 느껴지는 업무 시간들을 알차게 보낸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저녁 시간부터다. 언제부터인지 밤이라는 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아직까지도 곧잘 방황하는 바다. 많은 경우 누군가와, 혹은 혼자서라도 술잔을 기울이며 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데 의사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일주일에 두 번 이상 30분씩은 운동도 해줘야 하고 책을 읽거나 취미 생활을 가지면 좋다는데 퇴근 시간이 워낙 불규칙하다는 핑계로 몸에 좋은 이것들을 해보지도 않고 잘도 숨겨두고 있다. 술을 먹지 않는 날에는 사이드 잡으로 하고 있는 브랜드 사업 일을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사이드 잡으로 해보고 있는 에이전시 사업 일을 보기도 하고, 그렇지도 않은 날에는 '자기계발이 필요하다'며 억지로라도 책을 손에 쥐기도 한다. 그것도 아닌 날에는 그저 하릴없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어쩌면 나는 시간의 덧없음을 애써 외면하지도, 와락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오늘'이라는 많은 날들을 흘려 보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이미 흘려보낸 시간과 흘려보내고 있는 시간들이 너무나도 아깝다. 그렇다고 그 시간을 무언가로 밀도있게 채우기엔 나의 한계가 명확한데. 어쩌나 하고 있는 나에게 아이러니하게도 위로가 되는 한 가지가 있었으니, 바로 수면 명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누워서 나의 하루가 어땠는지 돌아보고 나의 몸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는 명상 요법인데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 우울을 겪는 내게 꽤나 괜찮은 위로로 다가왔다.
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인데 어떤 나는 우울하고 어떤 나는 평안하다니. 달리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현상 자체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생각할 줄 알고 흘려보낼 줄 아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거겠지. 그럼에도 퇴근 후 글을 쓰고 휴일에 영상편집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머리로는 괜찮은데 마음은 아직 괜찮지가 않다. 받아들임에도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오늘도 시계만 보며 밤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