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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진소라 Aug 17. 2022

깔끔한 것, 덜 깔끔한 것

나를 숨 쉬게 하는 것들에 대하여

 미팅이 있어 오랜만에 판교에 간 날이었다. 같은 회사 동료이자 톰과 제리 같은 영혼의 듀오와 함께 시원스럽게 뻗은 길을 걸었다.  

 "판교 너무 좋다, 뭔가 깔끔한 느낌이랄까? 계획도시라 그런가"

 상대방이 뭐라 답하기 어정쩡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나는 뭔지 모를 이질감을 곱씹었다. 생각해보면 깔끔한 게 늘 매력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깔끔하다'는 '생김새 따위가 매끈하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깔끔 떤다'라는 말은 있어도 '더럽 떤다'나 '더러움 떤다'라는 말은 없다. 깔끔한 것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몰두한 것처럼 보일 때 일종의 비아냥거리는 말이 준비되어 있으나 덜 깔끔한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저격할 만한 단어가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선 없다. '더러워 죽겠다'라는 말은 있지만 '-죽겠다'는 사실 만인의 연인 같은 접미사니까 예외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게다가 흔히 보는 증상 중 결벽증은 있지만 오(더러울오)벽증 같은 개념은 세상에 없다. (만약 내가 생각해내지 못한 다른 사례가 있다면 제보해주길 바란다.) 이쯤 되면 더러운 것보다는 깔끔한 것에 대한 집착을 훨씬 더 경계해야 한다는 모종의 계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더러운 것, 아니 덜 깔끔한 것은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 걸까.

 돌이켜보면 덜 깔끔한 것들은 우리를 숨 쉬게 하는 것들이다. 손으로 빚어 만든 찌그러진 도자기 화병도 그렇고 본래 무슨 색이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바랜 노포 식당의 간판도 그렇다. 작년 할로윈 데이 때 배달 어플로 주문한 귀염 뽀짝 한 몬스터 모양 컵케이크가 배달 기사님의 스피드 정신으로 인해 몽크의 절규처럼 흘러내려버린 모습도 그렇다. '원래 그랬어야 할' 모습으로 정돈되어 있지만은 않은 것들을 보며 나는 아이처럼 크게 기뻐한다. 마치 옥에 티를 발견하는 기분이랄까. 드라마를 보며 옥에 티를 한 번이라도 발견해봤던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본디 내가 발견한 옥에 티가 가장 가치 있게 느껴지는 법이다. 거기에 태초의 모습은 어땠을까, 하고 상상하는 맛도 있다. '도대체 얘는 어떤 시간을 보내온 걸까', 싶은 것들을 알아보고 상상하는 내 모습이 꽤 근사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나만 더 보태자면 정돈되어 있지 않은 것들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게 콜라주 기법이다. 그 유명한 피카소 선생님께서 최초로 시도한 기법이라고도 하는데 물감으로 '그리는' 게 당연했던 시대에 신문지나 우표 같은 실물을 '붙이는' 기법으로 비정돈 예술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예다.  

 세상에는 무 자르듯 자로 잰 듯, 오와 열을 맞춰 깔끔하게 정돈한 계획도시와 같은 것들이 많아지고 있다. 마치 빨래한 수건을 널 때 택이 뒷면으로 가도록, 그리고 포개었을 때 칼각이 되도록 널어야 한다 말하는 엄마의 잔소리 같은 거다. 그 자체로 보기에 아름답고 편리할 순 있어도 '거기가 거기'인 듯 개성을 잃은 것들을 보며 마냥 기쁘지가 않다. (물론 잔소리 때문은 아니다.) 이쯤 되니 나를 숨 쉬게 하는 것들은 계획형 인간이라는 MBTI에 모순적이게도 무계획, 무질서, 비정돈이 가져다주는 빈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빈틈들에 얼굴을 들이밀고 숨을 들이켜본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얼굴에 박박 부볐던 토너 묻은 화장솜을 그대로 화장대 위에 널부러뜨려놓고 고양이 털이 잔뜩 묻은 잠옷을 허물처럼 널브러뜨리고 외출을 한다. 이제야 숨이 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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