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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진소라 Aug 21. 2022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술

내가 술을 마셔온 이유에 대하여

 술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늘상 빼지 않고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편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경우 ‘술을 잘 드시나 보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사실 이런 이야기의 흐름이 썩 달갑지는 않다.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그걸 꼭 잘해야 하는 법은 아니니까, 무언가를 잘하지 않지만 순수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축되게 하니까. 하지만 술에 대한 이야기에 있어서 나는 관대하다. 저런 반응에 당황하지 않고 달갑게 대답한다, “네 잘 먹는 편인 것 같아요”라고.

 처음부터 술을 잘 마셨던 건 아니다. 갓 대학생이 된 스무 살, <벚꽃엔딩>이 주야장천 흘러나오던 중간고사 시즌 때까지만 해도 난 내 한계치가 소주 반 병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 세상에나, 엠티를 다니고 동아리 술자리를 다니고 무수히 많은 “짠”을 외치면서 깨닫게 되었다. 나의 오장육부가 생각보다 술을 잘 받아먹는다는 것을. 물론 여기서 ‘잘 받아먹는다’는 것이 ‘맨 정신으로 잘 버틴다’의 의미가 아닌 점을 분명히 해둔다.

 내가 술을 가장 자주, 많이 마신 건 신입사원 때였다. 취업이라는 인생의 중대 과제를 해치운 직후임에도 뿌듯함보다는 공허함이 컸다. 으레 다음 과제를 부여받기 전 일시적으로 방향성을 잃은 듯한 감각, 그런 종류의 공허함이 아니었다. 분명 내가 원해서 ‘선택’한 회사인데 어쩐지 하나부터 열까지 나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고 ‘선택’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아, 이 공허함은 이제 와 깨닫게 된 거지만 내 안의 자아가 텅 비어버린 듯한 감각이었다. 나는 텅 빈 속을 술로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 8시간 동안 ‘회사’에 갇혀 빼곡히 쌓여온 우울과 분노의 조각들은 매일 밤 술을 먹고 자라났다.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와인 한 병을 혹은 맥주 2,000cc를 곧잘 혼자 해치웠고 어떨 땐 한계치 이상의 술을 마시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했다. 어쩌면 술을 마시며 한껏 부풀어 오른 감정의 조각들에 마음의 근육이 찢겨나가면서, 역설적이게도 ‘아직 살아있음’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마음이 동나기 전 나 스스로 심리상담센터를 찾은 것이었다.

 상담을 받으며 조금 나아지기는 했으나 술을 완전히 멀리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당시에 만나고 있었던 (지금은 헤어졌고 헤어지길 잘한) 연인 때문이었다. 그는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늘 술을 찾았고 내가 아파서 약을 먹고 있다 해도 술을 마시라고 권했다. 그가 입 밖으로 말을 꺼낸 적은 없으나 함께 술을 마시지 않으면 관계가 유지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20대 초중반의 나는 애석하게도 그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술을 택하는 날이 많았다.

 이밖에도 나는 미디어의 농간에 자발적으로 놀아나며 술을 마셨다. 맥주가 더 많이 등장하는 <나의 아저씨>를 보며 소주를 찾았고 <멜로가 체질>을 보며 캔맥주를 경쾌하게 따댔다. <호텔델루나>를 보며 장만월 사장이 즐겨 마시는 샴페인 대신 가성비 좋은 화이트 와인을 음미했고 <리스본행 야간열차> 영화를 보며 밤새도록 포르투 와인으로 병나발을 불어 제꼈으며 <기묘한 이야기>를 보며 미국산 버번위스키를 우아하게 홀짝였다. 영화와 드라마에 더욱 몰입하는 나만의 감상법이랄까.

 술을 꾸준히 마신 또 다른 이유는 ‘관계’에 있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좀 더 끈끈해지려면 술이 필요할 것 같다는 어설픈 핑계이긴 한데 확실히 술이 있으면 맹물만 마시는 것보단 진솔한 이야기가 오가는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인지 누군가가 힘든 일이 있었다고 말하면 나는 응당 그 자리에서 술을 시킨다. 술잔을 채워주고 잔을 함께 부딪히는 것이 그에게 ‘내가 당신 앞에 있다는’, 작지만 분명한 위로가 될 것이라 굳게 믿어왔기 때문이다. 덧붙여 고백하자면 이러한 위로의 고백 외에도 좋아한다는 고백, 미안하다는 고백, 고맙다는 고백을 비롯해 수많은 고백을 취중진담으로 해왔다. 어쩌면 나는 항상 술로, 무언가를 ‘고백’할 용기를 얻어왔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술. 술 덕분에 청승 떨 명분이 생겨 친구와 함께 마음껏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놓치고 싶지 않은 멋진 술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그 사람이 곧 평생을 함께 할 남편이 되었다.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상상 이상으로 몰입해서 볼 수 있었고 그렇게 인생 작품들이 생겼다. 필름이 끊기고 가방과 핸드폰과 지갑을 몽땅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존재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적도 있다. 이래저래 사건 사고가 따라붙는 술이지만 따지고 보면 나를 망친 만큼 나를 구원해 주는 셈일지 모른다. 그래도 이제는 나를 망치는 날보다 구원하는 날이 더 많을 수 있도록, 나를 갉아먹는 술자리보다 나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드는 술자리가 될 수 있도록, 오늘도 나는 술을 경계하고 또 사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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