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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진소라 Sep 06. 2023

반 고흐의 초상화 앞에서

회화 한 점, 사진 한 장, 글 한 조각이 주는 위로

 아직 학생일 적, 홀로 유럽 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당시에 나는 런던에서 어학연수 겸 해외인턴 과정을 수료한 상태였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 3주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유럽 곳곳을 여행하려는 계획이었다. 제일 먼저 고른 여행지는, 말로만 듣던 낭만의 도시 파리. 파리에 처음 와본 관광객이라면 으레 한 번씩 들르는 오르세 미술관에 들어선 날이었다.

 전날 밤 숙소에 함께 묵는 다른 여행객들과 마신 와인 탓인가, 컨디션이 개운치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한국에서 전시를 볼 때 자주 마주쳤던 그림들을 슥슥 지나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 펼쳐진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여러 회화 작품들을 지나쳐 반 고흐의 초상화 앞에 당도했을 때 내 동공은 순간 있는 힘껏 확장되었고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스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뭐지? 왜 그림 하나 보는데 눈물이 나지?

 그림을 보며 나는 반 고흐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상상했었다. 전시회장의 빛을 받아 그림자가 질 정도로 물감이 두텁게 발려있는 걸로 보아하니 물감통에서 물감을 움푹 떠서 캔버스에 거칠게 발랐겠지. 턱턱 거침없이 캔버스를 채워가는 그의 성격 상 물감이 뚝뚝 흐르는 것도 아마 아랑곳하지 않았을 거다. 물감이 발린 자국을 보니 왼쪽은 둥글고 오른쪽은 쪼빗하고 꼿꼿하게 서 있는 걸 보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물감을 발랐나 보지? 그럼 오른손잡이였을까, 왼손잡이였을까. 그는 이렇게 툭툭 그림을 그리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 초상화를 보는 누군가가 있다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길 바랐을까.

 이런 상상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밑도 끝도 없이 펼쳐져버렸다. 많은 이들이 아는 것처럼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원작자가 이 하얗고 작은 캔버스 앞에서만큼은 거침이 없었던 모습을 상상하니 그가 한없이 안쓰러워져 버렸다. 눈앞에 있다면 살포시 안아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달까. 그러면서도 나는 오묘하게도 한 줌의 위로를 얻었다. 고독한 삶을 살았던 그가 무심한 듯 정교하게 채워 넣은 그 캔버스를 10분이고 20분이고 하염없이 바라보며 감히 그의 지난 삶을 읽었고 어쩌면 그러한 삶으로 인해 탄생하여 내 눈앞에 놓이게 된 이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에 감화되어 넋을 놓았던 것이다. 나의 불행도 누군가에게 이러한 아름다움으로 가 닿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비집고 나왔지만 애써 누르는 중이었다.

 그림 앞에서 실컷 울고 다른 그림들을 보며 마음을 진정시키고선 미술관 밖으로 나섰다. 버스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요량이었다. 빨간색 버스였나, 아무튼 버스에 올라타 바깥 풍경이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고 창틀에 턱을 괴고 아직도 식지 않은 마음을 색색 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또 한 번 내 동공이 탁 트이게 되었는데 글쎄 무슨 종인 지는 모르겠으나 창밖의 나무를 보았을 때였다. 가만히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순간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이 그 풍경에 겹쳐지면서 마치 나뭇잎 하나하나가 내 얼굴을 수놓는 물감처럼 보이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한 것이다. 어라, 이거 내가 방금 보고 나온 반 고흐의 초상화와 비슷한 모습 같은데.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다. 반 고흐도 혹시 이렇게 유리에 비친 풍경을 보고 자기 얼굴을 그렸을까? 그래,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서양인이든 동양인이든 얼굴색은 거기서 거기일 텐데 초록색이며 파란색 물감을 갖다 쓰는 게. 나는 마치 반 고흐 초상화의 탄생 비화를 세상에서 나 혼자 알게 된 마냥 좋아했다. (물론 사실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알 길이 없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탄복하며 나는 소중한 비밀을 알게 된 마냥 버스 한 구석에서 숨죽여 웃었다. 그리고 그때의 비밀스러운 상상은 아직까지고 나를 즐겁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예술과 문화가 누군가에게 주는 위로란 이런 것이 아닐까 종종 생각한다. 그 자체가 지닌 아름다움도 의미가 있지만 그걸 재료로 어떤 상상을 하고, 그 상상에서 어떤 의미를 찾느냐에 따라 작품에서 얻는 위로감의 깊이는 확연히 달라진다. 물론 원작자의 삶에 대한 정보가 몇 조각 더 있다면 그 상상이 더욱 쉬워질 수도 있다. 나와 몇 세기나 동떨어진 사람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때로는 끊임없는 우울과 불안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그와 묘한 유대감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그가 지나온 삶의 공허함에 격한 공감을 하게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나의 불행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도구가 있다면 그것은 예술이라 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불행할 때 염치없게 반 고흐를 떠올린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가인 그에게 이 글을 나누고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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