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생 최고의 행복은
“엄마! 엄마아아아!”
설거지하고 있는데 은지가 큰 소리로 불렀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돌아봤더니, “사랑해요!” 한다. 얼마나 우렁차게 사랑을 고백하는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은지는 요즘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고백한다.
밥 먹다가도, 놀다가도, 뜬금없이 “사랑해요!”한다. 일곱 살이 되면서 표현력이 는 것 같기도 하고, 장난 같기도 해 그때마다 “응” “고마워” “나도 사랑해!” 하고 대답했다. 그러다가 문뜩 ‘내가 어디서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에 비춰보면, 나는 인생 최고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은지의 끝없는 사랑 고백에 “사랑을 너무 남발하는 거 아니야?” 하면서 푸하하 웃기도 했지만, 그런 모습을 자꾸 보면서 은지가 곧 사랑이구나, 싶었다. 은지는 사랑으로 태어났고, 사랑을 표현하고, 사랑으로 자라나고 있다.
은지만 그럴까? 시간이 갈수록 더 확신하게 되는 건, ‘사람이 곧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사랑을 표현하고, 그 사랑 속에서 사람이 태어나고, 사랑으로 자라난다. 육체뿐 아니라 피폐한 마음과 정신까지 사랑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나는 은지라는 사랑을 만났다. 친엄마랑 미혼모 시설에서 살던 은지는 또 다른 양육자가 필요했다. 우린 ‘가정위탁제도’를 통해 만났고 위탁가족이 됐다. 나는 은지의 엄마가 됐고, 은지는 우리 집 막내딸이 됐다.
돌쟁이 은지를 가운데 앉혀두고 은지만 바라봤다. 은지를 웃게 하려고 온 식구가 재롱을 부렸다. 은지 컨디션에 따라 일정을 조정했고, 은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은지가 가고 싶어 하는 곳에 갔다. 모든 게 은지 중심이었다.
사랑 속에서 무럭무럭 자란 은지는 이제 나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흔들리는 나에게, 지친 나에게 “엄마! 엄마아아아! 사랑해요!” 한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언제 이렇게 커서 사랑을 표현하는 걸까. 매일 봐도 신기하고 새롭다.
작년 이맘때였다. 은지가 어린이집에 갔다 오더니 대뜸 물었다. “엄마! 엄마도 은지가 뱃속에 있을 때 배가 이렇게 뚱뚱했어요?” 작은 손을 가슴 앞에 대고 크게 반원을 그리며 배를 쑥 내밀었다. 순간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은지는 해맑게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나는 은지 눈을 자꾸 피했다.
그날 밤엔 잠이 오질 않았다. 한참을 뒤척였다. 은지에게 말해줘야 할 때가 온 것 같은데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질 않았다. 깊이 잠든 은지를 바라보다가 이불을 어깨까지 덮어주고 또 한참을 토닥여줬다.
은지의 짙은 눈썹 위에 내려앉은 삶의 무게는 얼마큼일까?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은지의 체온을 느끼며 은지를 잘 키우는 게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은지가 잘 이겨내려면, 당차게 이겨내려면 결국 필요한 건 ‘사랑’이니까.
“은지야! 은지는 엄마도 둘, 아빠도 둘이야. 그러니까 두 배로 행복했으면 좋겠어!”
잠든 어깨를 안고 깊은 밤을 헤맸던 날이다. 그 후로 은지가 사랑을 느낄 수 있게 최대한 조심스러운 말로 ‘엄마도 둘, 아빠도 둘’이 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은지에게 어떻게 들릴지 매번 눈치를 살펴야 했다.
이젠 막연하게나마 이해를 하는 건지 얼마 전엔 은지가 먼저 물었다.
“엄마! 은지는 엄마 가슴에서 태어났죠?”
“그럼, 가슴이 이렇게 갈라져서 은지가 태어났어요?”
은지는 손바닥을 세워서 내 가슴을 쭉 가르는 흉내를 냈다. 그리곤 나를 빤히 쳐다봤다. 맑고 초롱초롱한 눈동자엔 내가 들어있었다. 나는 은지를 꼭 끌어안았다. 따뜻한 은지를 품에 안고 가슴을 맞댔다.
“그래, 엄마가 또 얘기해 줄게! 은지는 아기 때….”
나는 얘기하고, 또 얘기해 줄 것이다. 은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인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얘기하면서 우린 오랫동안 위탁가족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 놀라운 사랑의 힘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