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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판서를 하는가?

#14. 내가 수업시간에 판서를 고집하는 이유

by 한동훈

요즘은 컴퓨터 정보기기의 발달로 수업시간에도 태블릿 PC를 이용하는 교사들이 늘고 있다.


특히 교실 TV가 스마트 TV일 경우 태블릿PC랑 연동되어 바로 화면을 띠울 수 있고 교사들은 태블릿 PC를 통해 메모나 기록을 하며 학생들에게 이 화면을 보여줄 수 있다.


전자기기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인지라 아이들도 이런 수업을 선호한다. 예전 한 선생님이 학급 아이들에게 수업시간에 칠판에 판서하는게 낫니? 태블릿 PC로 내용 정리하는게 낫니? 라고 물었을 때 아이들도 태블릿 PC가 낫다고 답변한 적도 있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태블릿 PC 보다는 첫 교직생활 때부터 지금까지 줄곳 판서를 이용하고 있다.


사실 대학 다닐 때는 판서를 할 줄도 몰랐다. 사범대를 다녔지만 그저 전공 수업만 들었을 뿐, 실제 수업을 해 본적이 없어서 판서를 하는데 익숙치도 않았고 임용시험 수업 실연을 준비할 때도 처음에는 판서란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당시 수업 실연을 봐주던 친구가


"넌 왜 판서 안해?"

"어? 판서? 꼭 해야 하는거야?"

"당연하지. 판서가 얼마나 중요한데! 평가위원들도 판서 많이 봐. 얼른 해봐."


라고 해서 그때부터 판서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 못난 글씨가 칠판에서 춤을 추었다. 글자가 저마다 삐뚤삐뚤했고 어떤 글자는 위로 갔고 어떤 글자는 밑으로 향했다. 뒤에서 보고 있으면 지저분하게 칠판지운 흔적과 더불어 누가 봐도 눈쌀을 찌푸릴 정도의 판서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런 문제점을 나도 알고 있었기에 되도록 이를 연습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수업 시간에도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손가락에 힘부터 주어가며 또박또박 쓰려고 노력했고, 초임때는 방과 후에 다음날 수업할 내용에 대해 판서연습도 하고 갔었다.

솔직히 지금도 내가 판서한 칠판을 보고 있자면 영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그래도 나는 계속한다. 난 판서가 습관이고 판서가 좋기 때문이다.




내가 판서를 계속 고집하는 이유는 몇가지가 있다.


첫째는 딱.딱.딱.딱. 하는 이 소리가 아이들의 집중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수업시간 50분이 힘들다. 처음 수업시작 할 때에 비해 아이들은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고 눈꺼풀은 무거워지고 고개는 점점 아래로 향한다. 하지만 이런 아이들의 집중력을 불러일으키는 소리가 있으니 그게 바로 판서소리다. 아이들은 보통 선생님이 칠판에 적어주는 내용은 시험에 나올만한 것으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졸리는 아이들은 판서소리가 들리자마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펜을 잡고 내용을 따라서 적는다.


ps. 근데 솔직히 말하자면 교사가 판서하는 것은 꼭 중요한 내용만 적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그 단어나 용어를 처음 들어볼 때 이를 소개하고자 적는 경우도 있고, 교사가 설명을 할 때 말로만 설명하기가 힘든 부분을 보충하고자 적는 경우도 있다. 나는 가끔 분위기 전환용으로 내 일상생활을 이야기하면서 판서를 하기도 하는데 학교에 갓입학하여 잔뜩 긴장한 1학년들은 이런 판서까지 따라 적거나 따라 그리고 있어서 황당했던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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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판서를 통해 아이들은 그날 배운 내용을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다. 특히 50분 내내 교사 설명을 듣다보면 아이들은 딴 생각을 하거나 아니면 순간 순간에 집중하느라 수업 전반부나 수업 중반부에 했던 내용을 까먹는 경우가 있다. 반면 50분 전체를 판서한 내용은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그날 배운 내용의 기억을 되살려주고 머릿속에 정리를 도와준다. 학창시절의 나 같은 경우도 깔끔하게 판서하는 선생님의 수업일수록 내용을 이해하기도 쉬웠고 차후 공부하기도 수월했다. 또한 수업이 전반부 내용과 후반부 내용이 연계된 내용일수록 전체 수업을 판서한 장면은 아이들의 이해를 효과적으로 돕는다.



셋째는 내 주관으로는 판서를 하는 교사일수록 수업이 더 역동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흔히들 사람의 집중력은 30분 정도가 한계라고 말한다. 특히 같은 말투, 같은 움직임, 같은 화면을 보고 있으면 정말 재미있는 내용이나 장면이 아니면 아이들은 금방 지루해하고 점점 지쳐간다. 조벽교수는 <수업컨설팅>이라는 책에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하나의 수업시간이라도 다양한 수업도구를 활용하라고 설명한다. 수업시간에 활용할 수 있는 수업도구로는 교사의 설명도 있고, 내가 준비한 수업 내용을 담은 컴퓨터 화면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도구가 바로 판서인 것이다. 특히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면서도 내 입은 설명하고 있고 내 손은 자동적으로 칠판에서 판서를 하고 있다. 아이들은 그 순간만큼은 펜을 들고 내용을 정리하며 집중력이 최고조로 올라가고 내 움직임 하나 하나에 관심을 기울이며 고개를 끄떡인다. 그때서야 나는 아이들과 같이 호흡을 맞추고 있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음을 느낀다.


'이 녀석들 내 수업에 빠져들었구나.'




판서에 대해 글을 적으면서 예전 판서를 잘해주셨던 학창시절 선생님을 떠올려본다. 선생님께서 해주셨던 훌륭한 판서는 훌륭한 수업과 함께 하나의 담백하면서도 개운한 '멸치육수' 같았다. 한번은 감동이 몰려와 수업은 끝났지만 쉬는 시간 칠판 지우려는 친구를 제지하며 뜷어져라 판서한 내용을 쳐다본 적도 있었다. 마치 하나의 예술작품에 빠져들어 넋 나간 사람처럼 말이다.


깔끔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판서 정리.


대한민국 교사라면 누구나 갖고 싶은 능력일 것이다.


내 수업시간에도 아이들이 그런 긍정적인 판서 감동을 느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며 난 오늘도 수업시간에 열심히 판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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