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기로, 새로운 페르소나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민준은 계약직으로 다니던 회사의 박팀장에게 문자로 일방적인 퇴사를 통보했다.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다..’
멈출 수 없는 기차에 올라탄 듯한 그의 첫 번째 행동은 돈을 구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신용등급과 소득으로는 제도권 금융의 문턱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인터넷에서 하룻밤을 꼬박 새워 찾아낸 곳은 '백(白) 자산관리'라는 그럴듯한 간판을 내건 불법 사채 사무실이었다.
사무실은 낡은 상가 건물 3층, 온갖 종류의 오물을 토해내는 공용 화장실 바로 옆에 있었다. 문을 열자 눅눅한 담배 냄새와 오래된 방향제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백 사장'이라 불리는, 굵은 금목걸이를 한 남자가 낡은 가죽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그를 훑어보았다.
"그래서, 얼마가 왜 필요한데?"
민준은 청담동에서 느꼈던 굴욕감을 연료 삼아 준비한 시나리오를 읊었다.
"해외 비상장 바이오 기업에 투자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확실한 내부 정보가 있고 1년 안에 최소 다섯 배는 불릴 수 있습니다. 시드머니가 급하게 필요합니다."
"생활비 좀..." 따위의 말이었다면 듣는 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민준이 '투자', '내부 정보', '다섯 배' 같은 단어들을 미끼처럼 던졌을 때, 백사장의 눈이 번뜩였다.
민준의 불안한 시선과 어설픈 거짓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단 하나의 진실, '절박함'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채 바닥에서 구른 세월 동안 백사장이 배운 것은, 절박함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고 달콤한 담보라는 사실이었다.
"좋아. 1억. 선이자 떼고, 연 100프로. 1년 뒤 원금 상환. 못할 것 같으면 지금 바로 저 문으로 나가면 되고..
하루라도 늦으면… 알지?"
백 사장은 민준에게 신체포기각서나 다름없는 서류 몇 장을 내밀었다. 민준은 부모님의 이름과 주소를 보증인 란에 적어 넣으며 손을 떨었다. 이것은 돈을 빌리는 행위가 아니었다. 자신의 영혼과 가족의 평온을 저당 잡히는 계약이었다. 그는 묵직한 돈다발을 가방에 넣고 나올 때, 자신이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직감했다.
그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강남의 중고 명품 시계 매장이었다. 다니엘 정이 찼던 파텍 필립은 그의 예산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는 차선책으로, 그러나 가장 상징적인 대안으로 친구 정현의 손목에서 봤던 롤렉스 모델을 골랐다. 새것 같은 중고품이었지만, 가격표는 그의 연봉과 맞먹었다.
묵직한 쇠붙이가 그의 마른 손목을 감싸는 순간, 그는 잠시나마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빌린 돈의 일부는 주말 이틀간의 슈퍼카 렌트비로 예약했다. 포르쉐 911 카레라. 청담동 레스토랑 주차장에서 그에게 굴욕을 안겼던 바로 그 차종이었다.
금요일 저녁. 민준은 한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는 다니엘 정의 인터뷰 영상을 수십 번 돌려보며 연습한 대로, 자신감 넘쳤다.
"소희 씨, 저녁은 아직이죠? 지금 거의 다 도착해가요. 내려올 준비해요."
한소희가 사는 빌라 앞에, 매끄러운 곡선의 은색 포르쉐가 엔진음을 나직하게 울리며 멈췄다. 그녀가 현관을 나서는 타이밍에 맞춰, 민준은 자연스럽게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마치 수백 번은 해본 일처럼. 그의 이런 젠틀한 행동은 소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와…." 소희는 낮은 차체에 몸을 실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의 시선은 고급 가죽 시트와 복잡한 계기판, 그리고 자연스럽게 운전대를 잡는 민준의 손목 위 롤렉스에 차례로 머물렀다. 모든 것이 완벽한 그림이었다.
그는 그녀를 최고급 레스토랑으로 데려갔고, 식사 후에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남산의 한 루프탑 카페로 차를 몰았다.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보석처럼 펼쳐졌다. 그 풍경에 감탄한 것은 소희였다.
"민준 씨! 저기 야경 좀 봐요. 진짜 너무 예쁘다." 그녀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민준에게 건네며, 부탁을 했다. "저기 창가에 서 있을 테니, 사진 한 장만 찍어줄래요?"
이것이 민준이 계산하고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그는 흔쾌히 스마트폰을 받아 들었다.
"그럼요. 잠시만요, 제가 또 사진은 좀 찍습니다."
그는 능숙하게 구도를 잡고, 조명을 확인하며 그녀의 사진을 여러 장 찍어주었다.
소희는 결과물에 매우 만족하며 활짝 웃었다. 민준은 그녀에게 스마트폰을 바로 돌려주지 않았다. 대신 화면을 자신 쪽으로 돌려 셀카 모드로 전환했다.
"자, 이번엔 주인공들이 같이 나와야죠. 여기 보세요." 그는 어색해할 틈도 주지 않고 소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자연스럽게 포즈를 유도했다. 그는 한 팔을 길게 뻗어, 야경과 두 사람의 얼굴이 프레임 안에 모두 들어오는 셀카 구도를 완성했다. 찰칵. 사진 속에서 그는 성공한 남자의 여유로운 미소를, 소희는 그런 남자 친구 곁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사진은 '연출된 솔로샷'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현실적인 증거였다.
그날 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그 커플 사진을 업로드하며 한 문장을 덧붙였다.
‘치열한 일상 속, 잠시의 휴식.’
반응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성공'에 '아름다운 연인'이라는 가짜 트로피가 더해지자, 그의 페르소나는 완벽한 서사를 갖추게 되었다. 팔로워들은 열광했다.
'Next Buffett' 님… 성공에 미모의 여자친구까지… 다 가지셨군요.'
'형수님 미인이십니다! 형님 옆자리는 아무나 앉는 게 아니지.'
'저런 여유… 저런 삶… 저도 Buffett 님 따라서 꼭 성공하겠습니다.'
사진은 그의 글에 '진짜'라는 인증 마크를 찍어주었다. 그의 팔로워는 순식간에 수천 명이 늘었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완전히 믿고 숭배하기 시작했다. 그는 레버리지의 마법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만끽했다.
하지만 마법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랐다. 그의 스마트폰 알림이 쉴 새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 DM과 커뮤니티 쪽지가 폭주했다. 이제는 질문이 아니었다. 거의 애원과 맹신에 가까웠다.
'형님! 저 결혼자금 5천만 원 전부 넣으려고 합니다! 딱 한 종목만 찍어주십시오!'
'Buffett 님, 지금 XX 바이오 풀매수해도 될까요?'
'지금 폭락장인데, 형님은 뭘 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포트폴리오 공유 좀 부탁드립니다!'
그의 성공을 증명한 사진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진짜 실력을 증명하라는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더 이상 해외 리포트의 두루뭉술한 분석 글을 베끼는 것만으로는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이제 구체적인 답, '정답'을 원하고 있었다.
포르쉐를 반납하고, 반지하 원룸으로 돌아온 민준은 손목의 롤렉스를 내려다보았다. 시계는 여전히 차갑게 빛나고 있었지만, 이제는 성공의 상징이 아니라 그의 목을 조여 오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월 300달러짜리 해외 유료 리포트 사이트를 열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영어와 복잡한 그래프들을 보며, 그는 다음 거짓말을 꾸며내기 시작해야 했다.
[5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