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 캐피탈]EP05-젖은 블랙베리와 흙내음

by 다소


민준의 스마트폰이 눅눅한 반지하 원룸의 정적을 깨뜨렸다. 발신자는 ‘소희 씨’. 그는 목을 가다듬고, 최대한 부드럽고 여유로운 톤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의 페르소나가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응, 소희 씨. 일 끝났어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민준 씨! 대박! 나 지금 유 대표님이랑 같이 있는데, 다음 주에 VVIP 와인 모임 하시거든? 거기에 민준 씨 꼭 좀 모시고 오라고 하시는 거 있지! 진짜 VVIP만 오는 모임이래!"


민준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는 배달 음식 쓰레기가 쌓여 있는 방구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현실과 수화기 너머의 세계 사이의 거리는 까마득했다. 그는 애써 미소를 가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요? 영광이네. 소희 씨 덕분인가."


"당연하지! 내가 민준 씨 얘기 엄청 했거든. 요즘 제일 주목받는 신생 VC 대표님이라고. 근데 민준 씨, 누가 나한테 VC가 뭐 하는 사람이냐고 구체적으로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제일 멋있어 보여?"


이 질문을 위해, 그는 이미 수십 번 답변을 연습해두었다. 그는 창밖으로 보이는 곰팡이 슨 담벼락을 보며, 가장 이상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음… 세상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보석 같은 회사들을 가장 먼저 발견해서, 그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사람들이라고 해. 우리는 돈을 투자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에 투자하는 거니까."


"와… 대박. 진짜 멋있다. 역시 민준 씨는 다르다니까!"


소희의 감탄을 들으며, 민준은 컵라면 국물을 하수구에 버렸다. 아직까지도 그녀는 민준이 강남의 고급 오피스텔에 사는 줄 알았다. 그는 '업무 자료가 많아 집이 복잡하다', '보안이 너무 철저해서 외부인 방문 절차가 까다롭다'는 핑계로 단 한 번도 그녀를 자신의 현실인 낡은 원룸 근처에 오지 못하게 했다.


소희가 전화를 끊자마자, 민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시선은 옷장 한쪽에 걸린, 그의 유일한 정장으로 향했다. 청담동에서 그를 주차 요원으로 만들었던, 광택만 번들거리는 싸구려 정장. 저 옷을 입고 한남동 VVIP 모임에 가는 것은, 이마에 '나는 사기꾼입니다'라고 써 붙이고 가는 것과 같았다. 롤렉스 시계와 저질 정장의 조합은 신뢰가 아닌 의심만을 불러일으킬 터였다.

그는 노트북을 켜고 '남성 정장 렌탈'을 검색했다. 수십 개의 업체 중, 그는 가장 비싼, 명품 브랜드 전문 렌탈샵을 골랐다. 보증금과 1박 2일 대여료는 그의 남은 생활비를 전부 털어 넣어도 모자랐다. 그는 결국 다음 달 카드값으로 돌려막을 생각으로 결제를 감행했다. '톰포드'의 차콜 그레이 색상 수트를 고르며, 그는 이것 또한 '페르소나'를 유지하기 위한 투자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모임 당일, 그는 렌탈샵에서 막 찾아온, 아직 온기가 남은 듯한 수트로 갈아입었다. 몸에 감기는 고급 원단의 감촉은 그가 입어본 그 어떤 옷과도 달랐다. 롤렉스 시계와 톰포드 수트, 그리고 그의 불안한 심장이 하나의 세트가 되었다.

어색하게 들어온 갤러리는 다른 차원의 공간 같았다. 거대한 추상화들 사이로 낮은 조명이 흐르고, 사람들은 샴페인 잔을 든 채 낮은 목소리로 대화했다. 공기 중에는 값비싼 향수와 희미한 와인 향,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계급 의식이 짙게 떠다녔다. 다행히 그가 입은 수트는 이곳의 그 누구와 비교해도 초라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은 그의 수트와 시계를 힐끗거리며 그의 재력을 가늠하는 듯했다. 그는 겉모습이 완벽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대여 시간 내에 흠집 없이 반납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완벽한 이질감으로 다가왔다.


"이번에 저희 포트폴리오사 하나가 시리즈 B 라운드에서 500억 밸류를 인정받았어요."

"요즘 AI 쪽은 버블이 너무 심해. 캐시플로우가 나오는 딥테크 기업을 봐야…."

"엑싯(Exit) 전략은 IPO보다는 M&A가 현실적이겠죠."


그들이 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수백, 수천억의 돈을 의미했다. 그들은 마치 게임 캐릭터의 능력치를 논하듯, 수많은 청년들의 꿈과 땀이 담긴 회사의 운명을 논하고 있었다. 민준은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사기꾼인지, 그리고 동시에 이들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세계에 사는지 실감했다.

문제는 모임의 주최자인 유 대표에게서 시작되었다. 소희의 소개를 받은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민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소희 씨, 이분이 말로만 듣던 그분이시구나. 반갑습니다, 김민준 대표님. 투자 커뮤니티에서는 Next Buffet으로 글도 쓰신다고..."


민준이 유대표에게 어색하게 명함을 건네자, 유 대표는 마침 서버가 따르고 있던 짙은 붉은색 와인잔을 그에게 건네며 그의 전문성을 시험하려 들었다.


"마침 귀한 와인을 열었는데, 김 대표님 같은 전문가의 의견은 어떠실지 궁금하네요.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오르넬라이아' 2015년 빈티지입니다. 슈퍼 투스칸의 자존심이죠. 평론가 점수도 아주 높았고요."


민준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오르넬라이아'. 그가 밤새 외운 프랑스 와인 '샤토 마고'와는 품종도, 산지도, 역사도 전혀 다른 와인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됐다. 여기서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가 비싼 돈을 주고 빌린 수트와 그의 모든 것은 우스갯거리가 된다.

그는 마지막 남은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외워둔 각본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잔을 들어 조명에 비춰보며 색을 확인하는 척했다. 그리고 다니엘 정이 그랬던 것처럼, 잔을 천천히 돌리며 향을 모았다. 코를 깊이 박고 숨을 들이마신 뒤, 잠시 눈을 감았다. 모든 동작은 유튜브에서 100번은 돌려본 전문가의 그것과 똑같았다. 마침내 그는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고, 혀로 굴리듯 맛을 음미했다. 주변에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한, 길고 고통스러운 침묵의 시간이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음…"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짚으며, 암기했던 '샤토 마고'의 리뷰를 읊조렸다.


"…잘 익은 블랙베리의 농축된 풍미가 아주 인상적이군요. 그 뒤를 이어 올라오는, 안개 낀 숲속을 연상시키는 젖은 흙내음… 그리고 은은한 제비꽃 향이 아주 매력적입니다. 타닌의 구조감은 견고하지만, 동시에 벨벳처럼 부드럽네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민준은 망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이건 보르도 와인이 아닌데요?"라고 말하는 순간 끝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주최자인 유 대표였다.


"역시..'젖은 흙내음'이라…! 제가 막연하게 느끼던 이 와인의 매력을 정확하게 언어로 정의해주시는군요.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그 한마디가 신호탄이 되었다. 옆에 있던 다른 벤처 투자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맞습니다. 저도 블랙베리 향은 느꼈는데, 제비꽃 향까지 잡아내시다니. 대단한 미각이십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잔에서 '젖은 흙내음'과 '제비꽃 향'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도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나는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격을 떨어뜨리는 행위였다. 민준의 값비싼 수트와 자신감 넘치는 태도, 잘나가는 투자 전문가라는 그의 후광은, 와인의 실제 맛을 압도하는 강력한 필터가 되어 사람들의 혀를 지배했다.


민준은 위기를 넘겼을 뿐만 아니라, '투자는 물론이고 문화적 소양까지 갖춘 인물'이라는 새로운 페르소나까지 얻었다. 소희는 자랑스러움과 존경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다른 VC 대표가 그에게 다가왔다.


"김 대표님, 대단한 감식안이십니다. 방금 그 표현은 마치 잘 만든 보르도 와인을 마시는 듯한 착각을 주더군요. 혹시 최근 반도체 시장의 다운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저희가 투자한 팹리스 업체 때문에 골치가 아파서요."


새로운 공격이었다. 민준은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와인잔을 들어 보이며 여유로운 척 미소 지었다.


"좋은 질문입니다만, 대표님. 모든 위기 속에는 다음 시대의 패러다임을 열 씨앗이 숨겨져 있는 법이죠. 저희는 섣불리 반응하기보다는, 조용히 지켜보며 씨앗이 모습을 드러낼 때를 기다리는 쪽입니다."


뜬구름 잡는 선문답 같은 말이었지만, '기다린다'는 말은 묘한 무게감을 주었다. 상대는 "역시, 깊은 뜻이 있으시군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은 잔에 남은 와인을 마셨다. 씁쓸하고 떫은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는 깨달았다.


이 화려한 세계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능력이 없거나, 혹은 그럴 의지가 없다는 것을. 그들은 정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듯한 정답을 말해주는 권위자를 원할 뿐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그와 같은 사기꾼이 번성할 수 있는 최고의 토양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6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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