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자전거
어느 해 늦은 가을.
4발 자전거의 보조바퀴를 떼면서 아이의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7살의 꼬마가 8살이 되어 학교 입학을 하며 마치 자기가 다 컸다는 뿌듯함과 같은 느낌의 어깨 뿜뿜이었다.
겨울의 느낌이 물씬 나는 추운 날임에도 그 뿌듯함을 내려놓지 못하고 어디든 무조건 자전거를 가지고 다녔다.
아이는 본인이 형아가 됐다는 들뜬 마음을 자랑하고파 동네 순회를 마치고 태권도장을 가려니 늦었다.
급한 마음에 건물 1층에 엎어지듯 자전거를 세워두고 수업을 하였을 터.
아뿔싸~!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그 자전거가 없어졌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나 어느 집 누가 타고 있는 본인 자전거를 보았다며 급하게 집으로 뛰어들어왔다.
자기 자전거니 돌려달라고 했으나 그 집 엄마가 '니거 아니야!'라 했다며 억울함을 가득 담은 상태였다.
해가 지나 따뜻한 봄날에 아이가 또다시 급하게 뛰어들어와 내 손을 잡고 빨리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작년에 잃어버린 자전거를 타고 있는 아이가 있으니, 집으로 가기 전에 엄마가 가서 찾아달라는 것이다.
혼자 자기 것을 찾으려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기에 이번에는 엄마의 도움이 절실했다.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지만 나는 겁이 났다.
작년에 아이가 먼저 '내 거니 돌려주세요!' 했을 때 나도 못하는 것을 아이가 했음에 놀라면서도 제발 직접 나서는 일은 없기를 바랐다.
나는 한 번도 나의 것을 주장해보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큰 소리를 쳐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한 아이의 엄마였기에 이번만큼은 아이를 믿어야 했고, 우리 엄마가 반드시 찾아줄 거야!라는 눈빛에 나는 부흥해야 했다.
아파트 단지 작은 분식집 앞에 놓여 있는 자전거는 분명 우리 집 아이의 것이었다.
자전거 앞에 매달려 있는 작은 소쿠리에 영역표시를 하듯 붙여놓은 스티커가 그대로였고, 작년 늦은 가을에 보조 바퀴를 뗀 자극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더욱더 분명하게 주장할 수 있었던 건 보조바퀴는 우리 집 베란다 한쪽에 여전히 있었고, 나의 핸드폰 사진 속 자전거를 타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서 똑같은 위치의 스티커로 충분히 확인이 가능했다.
분식집 안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는 그 집 엄마에게 다가가려 문을 열고 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멈칫했다.
그리곤 들려있는 발을 뒤로 빼고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 집 엄마가 쳐다보는 눈빛에 나는 바짝 움추러들었다.
그 눈빛은 지금도 제일 무서워하는 내 엄마의 눈빛과 너무도 똑같았다.
내 뒤에서 엄마가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아줄 거라 믿고 있는 아이를 위해 난 뭐라도 해야 했다.
"이 자전거 작년에 우리 아이가....."
"언제 사셨어요?"
내 목소리는 문 안쪽에 있는 그 집 엄마에게 닿지도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제발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의 엄마와 닮은 그 눈빛을 보며 돌려달라는 말하는 것이 힘에 겨웠다.
기다리던 아이가 지쳐 분식집 밖에서 놀고 있는 그 집 아이에게 한 판 붙을 요량으로 가까이 가는 모습, 아니 나와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용기를 내었다. 빨리 도망가자!
아이가 없는 틈을 타 나는 사정을 하였다.
"지금은 아이가 커서 이 자전거가 필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아이한테는 아빠가 사 준 소중한 물건이거든요. 그러니 아이에게 미안하다 한마디만 해주세요."
자전거를 찾지도, 미안하다는 말을 듣지도, 엄마의 눈빛을 이기지도 못했다.
내 것임에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하던 그때의 부끄러운 모습을 아이가 기억하고 있을까 봐 나는 또 다른 겁을 내고 있다.
엄마와 애증의 관계를 풀고자 애쓰고 있는 지금쯤에서 생각해 본다.
그때 그 집 엄마가 보는 눈빛이 정말 내 엄마와 닮았을까?
어쩌면 내가 느끼는 어떤 두려움을 모두 엄마의 눈빛이라 투사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