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그

by 소소한 특별함
그는 엄마가 가보라고해서 나왔다는 모범생이었다. 부모님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해서 자기 의견이 없다는 것이 흥미를 끌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들을 것 같았다. 열정도 없고 그놈의 광기도 없었지만 남자가 ‘양자 역학 이론’을 설명하면 재미있었다.
- 미오기전 일부 문장 -



일곱 살의 봄, 그의 세계에는 두 명의 이방인이 당도했다. 낯선 여자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문턱을 들어서면서 하나뿐이었던 동생이 둘이 되었다. 하지만 새로 생긴 '형제'는 축복이 아니었다. 동화 속 콩쥐의 새어머니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었음을, 그는 매일 아침 차가운 식탁 앞에서 깨달아야 했다.


아버지는 늘 부재중이었다. 출장이 잦았던 아버지는 집에 돌아올 때마다 새어머니가 정성껏 지어낸 '착한 아들과 딸'의 서사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기꺼이 가면을 썼다.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이는 모범생. 그것이 강성(强性)인 새어머니 아래서 그가 터득한 유일한 생존법이었다.


"오빠 자꾸 누가 날 불러."

"오빠 십자가가 눈앞에서 자꾸 움직여."


여동생의 정신은 그 지옥 같은 침묵 속에서 가정 먼저 허물어졌다. 하지만 새어머니는 병원 대신 기도를 택했다. 기괴한 '믿음의 치료'가 계속될수록 여동생의 방 한쪽 벽에는 붉은 색연필로 그려진 십자가가 번져나갔다. 성년이 된 여동생의 방은 이제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할 만큼 광기로 가득 찼다.


그는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잦은 출장은 집안의 실권이 온전히 새어머니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고, 여동생은 마치 '처치 해야 할 짐'처럼 서른을 훌쩍 넘긴 남자에게 팔리듯 결혼을 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아버지의 7번째 뇌수술로 많이 지쳐있었다. 비극적인 가족사에도 불구하고 그는 밝았고, 의지가 강하게 보였다. 병석에 누운 시아버지도, 이미 남처럼 지내는 시어머니도, 마음 아픈 시누이의 존재도 내게는 가벼이 여길만한 '시월드'에 불과하다 생각했다. 그가 그토록 침묵하며 견뎌온 시간은 인내심의 증거라고만 믿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일상의 막이 오르자,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그의 자격지심이 거품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 주말,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나들이를 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앞서고 있는 나를 불렀다. 그의 얼굴에는 사람과 차가 뒤엉켜 있는 상황에서 이미 짜증이 한가득 차 있었다.


"앞서 가지 마."

"딱 세 걸음 뒤에서 걸어."


나보다 겨우 한 살 많은 남자. 평생을 누군가의 밑에서 숨죽여 살았던 그는, 이제야 발톱을 드러내듯 제 밑에 두려 했다. 그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오래전 여동생의 방벽에 그려졌던 붉은 십자가의 잔상이 내 발등 위로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가 억눌리며 살아야 했던 지옥에서의 도망이 아니라, 군림하려 했다는 것을.



*위 글은 제공된 소재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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