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온다. 엄마다. 일 도우러 주말에 오라고 한다. 매주 오라는 눈치다. 네 시간 걸리는 영주에 살다가, 두 시간 걸리는 대구로 왔으니 그럴 수 있다. 지난 주말엔 연수 간다고 못 갔다. 연수는 다음에 가도 되지 않느냐며 다투었다. 아내에게 이번 주말 남해 가도 되는지 묻는다. “아들 왜 장가보냈냐며 차라리 이혼하라고 하지!”라고 말한다. 어제 장염으로 응급실 갔다 와서 그런가 하고 생각한다. 엄마에게 뭐라고 말할까 궁리한다. 아내가 허락을 안 해줘요. (사실이다) 아내가 아파요. (사실이다) 아니, 아파서 지금 입원했어요. (거짓이다) 주말에 아내 계모임이 있어요. (사실이다) 어떻게 말하면 다툼 없이 명쾌하게 거절할지 궁리한다. 전화할지 망설이다가, 하지 못하다가, 또 망설인다. 힘들면 농사를 줄이지 누가 그렇게 일 많이 하래? 누군 주말에 내려가서 힘들게 일하고 싶나. 명절에도 일만 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하다 이해하기를 멈추고 역정을 낸다. 시간은 공평하지 않아, 나이 든 엄마를 생각하다가, 오늘도 밤늦게 시금치를 개릴 엄마를 생각하다가, 발에 쥐가 나 잠 못 들고 골다공증으로 무릎에 구멍 나고 위암으로 수술한 엄마를 생각하다가, 나도 두 딸의 아빠고, 아내의 남편이고, 내 사정이 있다고, 부단히 줄다리기하면, 결국 넘어져 끌려가는 건 나다.
아빠 물죠. 아빠 아! (숟가락이 입으로 들어간다) 아빠 비타민. 아빠 초코. 여보 물. (불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 물 달라고 한다) 여보 파스. 여보 애들 물통 씻어야 해.
쓰고 싶은 게 떠올라 메모지에 글을 쓰고 싶은데 쓰지 못한다. 한순간에 날아갈까, 얼른 몇 개 단어를 적고 저장한다. 응가가 마렵다며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고 변기에서 몇 자 쓴다. 밤 열한 시는 넘어야 혼자만의 시간이 되고 어두운 방에 불 켜고 글을 쓰지만, 쓰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는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순간을 잡기 위해 애쓰는 것은 나의 일이고, 놀이고, 쾌감이고, 고통이다.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작가가 될 것도 아니고, 쓰면 누가 읽어 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글을 왜 쓰는지 나도 잘 모르는데, 누가 내 마음을 알까, 생각하다가, 엄마 마음도 그런가 생각한다. 그러다가 외로워진다.
아빠. 난 냄새를 맡으면 그 사람의 기분을 알 수 있어. 아빠 냄새를 맡으니 외롭네. 재하가 아빠 옆에서 자길 바라지? 오늘은 아빠 옆에서 자 줄게.
엄마의 냄새를 맡고 엄마의 기분을 알 수 있다면, 엄마의 냄새는 어떨까, 코를 킁킁거려 보다, “물!”이라는 말에 일어나 거실로 나간다.
‘연대’는 타인을 이해한 후에야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상관없이 그들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타인의 존재를, 그이의 고유한 세계가 있음을 부정하는 핑계가 될 수는 없다.
『타인을 듣는 시간』(김현우), P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