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꽃이 만개한 배나무들 아래에서 눈을 떴을 때,
아무래도
내가 오늘 오후의 가장 밝은 빛 중
하나가 되었다고
햇빛이 눈에 가득하고
벌들이 윙윙대며 배꽃 사이사이를 지나간다
근처를 지나가던 아이들이 그들의 보호자에게
나도, 나도 하며 옆으로 밀려들어오듯이 눕는다
어린 눈들에 햇빛을 가득 담은 채 까르르 웃었고
잘 가요
잘 가렴
무릎을 털고 일어나
머리카락에 낀 나뭇잎을 정리하며 걷고 있는데
배나무 농장을 지키는 흰 개가
한달음에 달려와
즐겁게 안긴다
이놈이 지키라는 농장은 안 지키고 아무한테나 가서
안기면 어떡해
저는 ...... 괜찮아요 좋아요
그래 ...... 귀엽죠? 어제 집에 없어서 몰랐는데
추운 데서 자면 입 돌아가 이걸로
택시를 타
이 장면들은
아무래도, 도무지
도무지
하며
밤의 배나무밭 근처 나무에 목을 매러 갔을 때의 일이었다고
한다
나무 근처로 정신없이 올라가다가
문득 뒤를 돌았는데
빛이 하나도 없는 어두운 밤에
배꽃들이 너무 하얘서
땅에 붙어 있는 흰 별들의 정류장과 같아서
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이거 한번만 아래에서 보자, 딱 한번만
하고 그 밑에 들어가 잠이 들었고
지금은 함께 바다 근처 사찰을 올라가고 있다
도착하면 네게
흰 구슬 염주 팔찌를 선물하려고
한다
도장도 파줄 것이다
네 이름 옆엔 배꽃 모양도 함께
새길 것이다
네가 그것들을 받아들고
기뻐하길
바라고 있다
잘가요
인사를 건넨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던 ‘어린 눈’을 챙겨 ‘배꽃’ 사이를 지나간다. 흰 배꽃이 ‘별들의 정류장’을 이루고 ‘흰 개’가 달려와 안긴다. 말을 건넨다.
이걸로
택시를 타
이십 대 후반. 시험에 또 떨어지고 집을 벗어나 대학가에 원룸을 구했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대학교 열람실에 들어가 대학생인 척 자리 잡고 교내 식당에서 자연스레 밥을 먹었다. 외로움의 끝이 어딜까, 미래를 훔쳐보던 시간. 해가 어둑해져도 대학가의 화려한 간판은 찬란했다. 그런 대학가를 걷는 것은 고욕이었는데, 귀에 이어폰 꽂고 노래 들으면 괜찮아지곤 했다. 그날도 그랬을 것이다. 외투 호주머니에 손을 깊게 넣고 바닥을 보며 귀엔 이어폰 꽂고 걸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버스 정류장을 지나고 누군가가 나를 툭 건드렸을 때, 앞을 보았다. 소녀가 나를 보며 햇빛이 가득 찬 눈으로 나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그 소녀가 웃으며 그 작은 손으로 나에게 건넸던 사탕 하나.
흰 별들의 정류장과 같아서
그 밑에 들어가 잠이 들었고
곧 소녀의 어머니가 나에게 죄송하다며 소녀를 데리고 갔다. 그 사탕 껍질을 까 입에 넣고 오랫동안 굴렸다. 천사가 나타나 나에게 괜찮다고 말을 건네는 것 같은, ‘한달음에 달려와’ 안기는 것과 같은,
중년이 지나도록 그때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 순간 마음에 알 수 없는 빛이 들어왔기 때문일까. 혼자 터널을 지나고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 가라앉았던 그 시절을 살게 했던 강렬한 무언가,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건네고, 손을 뻗어 건넨 마음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듯한 착각.
존경하는 선생님의 인터뷰를 진행했던 적이 있다. 이제는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가물가물하지만, 나에게 건넨 말씀이 강하게 나를 울렸다.
- 「갑을고시원 체류기」(박민규)에서 주인공이 제일 힘들어했던 것은 그저 물리적인 피폐함이 아닌 홀로 있는 그 외로움이라고 이야기해요.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것은 어떤 위로나 힘이 되죠. 그냥 말을 걸어 보세요. 그 순간 뭔가 힘이 될 거예요.
건네는 말과 손과 눈빛들. 그때 온기와 습도와 감촉들이 조금씩 남아 나를 지탱하고 있는 걸까. 어떤 의도치 않은 선한 행동과 순하게 말을 건네는 마음. 누군가에게 건네받은 ‘가장 밝은 빛’이 나에게 스며들어, ‘도무지 도무지’를 되뇌며 ‘정신없이’ 걸어갈 때 나도 모르는 사이 눈앞에 나타나 있는 소녀.
배꽃
그 안에 숨어있는 진실 하나
누군가는 당신이
기뻐하길
바라고 있다
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