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상담을 받기로 마음먹은 것은 정말 오래되었지만 마음이 맞는 곳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후기가 많고 좋은 센터라고 해도 상담사와 내 마음이 잘 맞지 않으면 정착하기가 힘들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 아픔에 대해 털어놓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센터가 나와 맞지 않으면 맞는 곳을 찾을 때까지 계속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매 번 같은 이야기를, 심지어 돈을 내면서 해야 한다. 이 과정이 참 어렵고 버거웠다. 그럼에도 나를 살리기 위해선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며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꾸준히 두드린 끝에 한 작은 심리센터에 정착하게 되었다.
상담 선생님은 한 분만 계셨고 인상이 좋으신 여자 선생님이었다. 이 분에게 치료를 받기로 마음먹었던 것에 큰 이유는 없었다. 벌써 몇 번은 반복해서 정작 나는 눈물도 나지 않는 내 이야기에 선생님의 눈가가 젖어있었고,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던 것이 이유라고 할 수도 있겠다.
오래전 일이지만, 하루는 상담 시간에 친한 친구들의 험담을 한 적이 있다. 속이 좁고 그릇이 작아서 친구들에게 꽁해 있던 마음을 선생님께 터뜨린 것이다. 사실 별 것도 아닌 것들이었지만 그땐 그게 그렇게 서운해서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상담 시간에 봇물 터지듯이 전부 쏟아냈던 것이다. 마치 큰일이 있었던 것 마냥 울분을 토해내듯이 친구들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혼자서 분해서 씩씩 거리기도 하고, 서운한 마음이 터져서 눈물을 삼키기도 하면서.
그렇게 실컷 친구들을 흉보고 나니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친한 친구들의 험담을 한 것이 갑자기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친구들의 좋은 점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참 따뜻한 친구들인데.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싶었다. 그리고 바로 선생님께 말했다.
"갑자기 친구들에게 미안해지네요. 사실은 정말 정말 좋은 친구들인데..."
선생님께서는 고개를 숙인 채 속죄하듯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나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본인에게도 미안하다고 하세요. 알고 보면 이렇게 좋은 사람인데..."
그 말을 듣고 순간 멍해졌다. 나는 나에게 한 번이라도 미안하다고 사과한 적이 있었나? 남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해왔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사과해 본 적이 없다. 가장 많은 시간을 나와 보내면서 나는 나를 얼마나 괴롭게 했던가. 그런데도 정작 내게는 미안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왜일까. 왜 그동안 나를 꾸짖고 나를 괴롭히고 헐뜯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하다 생각했을까. 가장 존중해주고 가장 아껴주어야 했던 것은 남이 아니라 나인데, 왜 나는 그렇게도 나에게 모질었던 걸까.
미안하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살아왔는지 생각해 본다. 하다 못해 지나가다 어깨를 잘못 스치는 일면식 없는 남에게도 '미안하다'고 하는데. 선생님의 그 한 마디가 나를 오랫동안 부끄럽게 만들었다.
오늘은 남이 아닌 나에게 사과하기로 한다.
"그동안 영문도 모르는 매질과 채찍질에 얼마나 아팠니. 미안해. 아픈 것도 몰라줘서 미안해. 내일은 오늘보다 더 아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