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바다로 나아가리라
화구를 꺼낸다. 베란다로 나가 이젤 위에 캔버스를 올리고 앞치마를 두른다. 인화한 사진 몇 장을 펼친다. 사진 속 태종대 자갈마당에는 황금빛 윤슬이 반짝인다. 사진을 넘긴다. 저녁 무렵 크고 작은 선박이 감빛 물결 위에 떠 있다. 흰여울마을에서 본 은빛 찬란한 바다와 증산공원에서 바라본 부산항, 베란다에는 푸른 바다가 들어와 앉는다.
배 한 척이 파도에 떠밀려 와 모래사장에 내팽개쳐 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낡고 작은 배 위에 노는 아무렇게 던져져 있다. 뱃머리에는 ‘반드시 밀물 때가 오리라, 그날 나는 바다로 나아가리라’, 글귀가 적혀 있다.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가 세일즈맨이던 젊은 시절 자신의 처지와 같은 배와 글을 보며 힘을 내었다는 그림이다. 그녀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담아 그림을 선물할 참이다.
사진 속 바다에는 그녀와 함께 보낸 날들이 정박해 있다. 녹록하지 않은 현실에 부대낌을 삭이지 못할 때면 우리는 바다로 향했다. 차 한 잔 앞에 두고 이야기 나누다 해변을 걸었다. 사진 몇 컷을 남기고 돌아올 때는 부대낌은 가라앉고 알 수 없는 기대로 가슴께가 뻐근했다.
팔레트 위에 물감을 짜 놓으니 안성맞춤 작업실이 꾸며진다. 검정 물감을 찾아 팔레트 위에 얹는다. 큰 붓을 들어 물감을 곱게 치대어 캔버스 가득 메운다. 세상은 온통 어둠이다. 초벌 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린다. 검은빛 화폭은 어둠 속에 잠기고 하늘과 바다, 길과 집도 잠들었다. 별 하나 뜨지 않는 세상은 온통 먹빛이다.
그녀와 연락이 끊어진 지난 몇 년, 마음의 출구를 찾지 못한 나의 하늘도 짙은 회색빛이었다. 문득 안부가 궁금할 때 보낸 메신저에도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낸 후 가끔 바뀌던 SNS 속 사진과 글귀도 요지부동이던 그녀가 먼저 만나자고 연락했다. 이해의 폭이 넓어진 탓일까, 그간 서운했던 감정보다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니 내심 반가웠다.
눈가에 잡힌 주름과 이전보다 살포시 부푼 몸매, 탄력을 잃은 피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코트 자락을 여미고 양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유리창에 비친 그녀와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모습, 둘 사이 체념과 포용의 시간을 보낸 흔적이 엿보인다. 공유하지 못한 하얀 공백은 대화 곳곳에서 배어 나왔으나 시간이 흐르며 어제 헤어지고 오늘 만나는 것처럼 점점 또렷해진다. 안정된 표정에서 그간의 안녕을 짐작하고 안도한다.
그녀가 깃들어 사는 세상은 깊은 바다처럼 고요하고 짙푸르렀다. 온화한 표정과 단정한 몸짓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고 직장에서도 인정받았던 그녀의 짙푸른 우울은 해결되지 않는 자신과의 갈등이었다. 함께 사는 이와의 갈등도 한몫했을 거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에 들렀다. 여러 화가의 그림을 걸어 놓고 팔기도 하는 갤러리 겸 카페였다. 커피와 유화물감, 다른 질감의 향이 한데 어우러졌다.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그림을 둘러보았다. 꽃 그림이 있는 한쪽 벽, 바다가 그려진 맞은편 벽면, 메탈릭 파우더를 섞은 유화, 무명작가들의 작품에서 실험적이고 풋풋한 감성이 묻어났다.
바다 저 멀리 떠 있는 배가 빛의 각도에 따라 흔들리는 그림 앞에 우리는 한동안 서 있다. 그림 앞에서 그녀는 시를 읊듯 나지막이 읊조린다. “늙지 않는 건 배움에 대한 마음뿐이구나. 길가의 창창하던 풀도 시들 땐 제 빛깔을 잃고 꽃도 피었다 질 때는 제 색을 잃는다. 사람도 늙으면 곱던 살빛 변하니 늙는 건 사람만이 아니지.”
세상을 바꾸려는 그녀의 의지는 늘 자신을 깨어 있게 담금질했다. 공부할수록 배움에 대한 열망은 깊어 가나 배움에 좋을 때란 건강이 보장될 때라는 말을 남기며 쓸쓸히 웃는다. 나 역시 건강이 나빠지고부터 책상에 오래 앉아 있기 힘들다며 넋두리한다. 글에 집중하는 시간도 짧아 틈틈이 일어나 스트레칭을 해야 다시 글을 쓸 수 있으니 우리는 이미 꽤 나이 들어 버렸음을 인정하자, 서로 위로한다.
코발트블루 색상을 검정 바탕 위에 덧칠한다. 정교한 붓질을 따라 시간은 촘촘히 흐르고 퇴적된 시간만큼 묵직한 침묵이 베란다를 가득 메운다. 색을 한 겹 덧입은 세상은 한층 깊이를 더한다. 시련과 상처로 점철된 그녀의 삶은 푸른색을 덧씌운 캔버스 위에서 청명하고 고요하다.
줄곧 꿈을 좇는 삶을 살았던 그녀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두꺼운 책장을 넘기듯 무감각하게 하루치의 달력을 찢는다고 말했던 그녀의 삶이 푸른 화폭 위에 겹친다. 세상 참 한결같다던 넋두리, 세상을 바꾸기 위해 죽어라 달려온 것 같으나 현실은 제자리걸음이라 한탄하면서도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물감이 꾸덕꾸덕해질 때를 기다리며 커피를 내린다. 몸과 마음이 청춘의 빛으로 분기탱천할 때, 우리는 흰 깃발에 청사진을 그려 기운차게 나아갔다. 서로 다른 꿈을 꾸며 뜨겁게 타올랐다. 순풍에 돛 단 듯 풀리다 자만으로 허방을 디딜 때도, 뜻과 달라 깊은 절망에 눈을 감았던 시간도 치열했기에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둠 속 빛을 따라 새 역사를 만들며 눈부신 미래를 열어 가던 개척자였다, 우리는.
카페를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지금 그녀는 화살을 뒤로 당기는 시점에 서 있다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화살은 뒤로 당겼을 때만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온몸의 근육과 골격이 정중동의 긴장과 이완을 통해 과녁을 향해 시공時空을 한순간에 모아 단련하는 궁수처럼 더 큰 도약을 위해 도움닫기 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커피 잔을 내려놓고 붓을 든다. 어둠 깊숙이 빛의 발자국을 찍는다. 동트기 전 어둠은 더 깊고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찬란하지 않은가. 황금빛 메탈릭 파우더를 노란 물감과 섞는다. 가는 붓을 들어 캔버스 구석진 곳을 찾아 메운다. 황금빛 파우더를 손가락으로 집어 빛이 반사되는 방향으로 흩뿌린다. 불규칙한 빛의 산란散亂, 어느 해 함께 보았던 아침 바다와 닮았다.
뱃머리에 그녀를 위한 응원의 글귀를 적는다. 물결이 지나는 굴곡을 따라 금빛 햇살이 넘실거린다. 검은 바탕을 켜켜이 쌓은 후에야 완성된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가 출렁인다. 푸르고 창창한 바다는 상처를 딛고 빚어낸 삶의 빛깔이다. 점점이 띠를 이루다 물살을 사로잡는 금빛 윤슬은 삶의 고뇌와 환희가 교차하는 시간의 퇴적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빛나는 순간이다.
그녀와 나는 다르지 않다. 그녀는 내 안에 있는 나였고 나는 그녀 안에 있는 다른 이름이다. 오늘도 우리는 하루치의 물감을 골라 캔버스 위에 풀어 놓는다. 세상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이루어지는 것이 없듯 켜켜이 쌓여 가는 시간의 틈 사이 생겨난 실패와 그로 인한 상처는 성장의 디딤돌이라는 단단한 이름을 지녔다.
붓을 들어 오늘을 기록한다. 그림이 마르면 그녀를 만나러 가야겠다. 너의 모든 것들이 빛나는 순감임을 잊지 말기를, 내 안의 말들이 전해지도록 그녀를 꼭 안아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