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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숙 Aug 31. 2024

한낮의 로큰롤

사랑을 갈구하는 청년의 함성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너무 한낮의 여름은 가만히 서 있어도 온몸이 땀에 젖는다. 에어컨 빵빵한 버스에서 내려 새벽시장을 가로질러 두어 차례 골목을 꺾어 돌면 감전동 행정복지센터에 도착한다. 약속이 취소되어 평소보다 일찍 도착한 행정복지센터에는 점심시간이 맞물려 출입문이 잠겨 있다. 여느 때 같으면 2층 강의실에는 일찍 도착한 수강생들이 글을 쓰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을 터였다.

사상 예술문화 아카데미 “삶을 가꾸는 생활 글쓰기” 강좌는 6월에 시작하여 10월까지 매주 월요일 2시부터 4시까지 20회차 수업으로 진행한다. 참여하는 이들은 글쓰기의 기본을 다듬고 장르별 글쓰기 창작 과정을 거치며 작가의 길을 꿈꾼다.

학창시절에 글에 재능이 있었거나 꽤 오랜 기간 습작 과정에 있는 분, 시를 오래 써 오신 분, 매일 일기를 쓰는 분, 모두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기량과 재능을 펼치며 작가의 재능을 드러냈다. 문학 이론을 공부한 후 과제 작품을 합평할 때면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에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회원들의 일취월장하는 실력을 보는 일은 강사에게는 큰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카톡으로 과제를 올리면 주제와 소재에 맞게 글을 창작해 온다. 분량이 길거나 짧은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일주일 안에 정해진 주제에 맞춰 글을 쓴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주말에 써야지 마음먹고 있다가 집안에 일이 생기거나 컨디션이 난조를 보일 때는 계획이 틀어진다. 나의 한 주의 중심은 글쓰기 수업이 될 정도로 회원들의 작품이 기다려진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밖으로 나와 어디 앉을 곳이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당산공원 벤치에서 중년의 사내가 손짓한다. 이곳에 나를 아는 이가 없을 텐데 생각하면서도 혹시 아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 기억을 되돌려 봐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얼굴이다. “왜 그러세요?” 나는 물었다. 아마 경계심 가득한 눈빛이었지 싶다. “뭐 물어볼 거 있지 않아요?” 그제야 상황이 이해되었다. 두리번거리는 모양을 보니 이곳 사람은 아닐 터, 무엇이든지 물어보면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행정복지센터가 점심시간이라 문을 닫았네요.” 얼버무리고 앉을 곳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그와 멀리 떨어진 벤치에 어르신 두 명이 있는 자리로 갔다. 그는 충분히 쉬었는지 조금 있다가 일어났다. 아마 이곳 토박이임이 분명하다. 이곳을 지나는 이들의 어떤 물음에도 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여기서 두리번거리는 이는 한눈에 봐도 길을 묻거나 방문할 곳을 찾는 이들일 것이니 친절한 마음으로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보라는 뜻이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참 따뜻한 마음이다.

손수건을 꺼내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손으로 부채질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왁자한 음악 소리가 쏟아진다. 미국의 록밴드 본 조비의 <You Give Love a Bad Name>이다. 굳이 해석하자면, 넌 사랑이란 이름에 먹칠을 했어, 난 내 역할을 다하는데 넌 게임을 하는 거지, 절규를 반복한다. 대학교 1학년 때 실연의 상처도 모르면서 다부지게 따라 부르곤 하던 노래이다. 사랑으로 상처받은 이가 외치는 흥겨운 노랫소리가 조용한 동네에 한동안 울려 퍼진다.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도 하나둘 일어나 쳐다보고 다시 앉는다. 나도 덩달아 고개를 빼고 쳐다보니 행정복지센터 옆에 세워 놓은 차량이 눈에 들어온다. 열어 놓은 차창으로 들려오는 노랫소리다. 주인공은 민소매 팔을 창에 걸친 채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부른다. 세대를 뛰어넘는 명곡이기도 하거니와 수십 년 전의 음악을 즐기는 혈기왕성해 보이는 청년의 감성에 눈길이 자꾸 머문다. 너무 한낮에 당산나무 아래에서 듣는 추억의 로큰롤이라니, 이색적인 분위기에 더위가 가시는 듯하다.

그제야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는 당산공원이다. 이곳 사람들을 넉넉한 가슴으로 품는 수령이 200여 년 된 팽나무 신목神木과 감전할매신당이 있다. 대개 당산과 신당은 마을의 한적한 곳에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와 옛 건물이 주는 거리감이 있는데 감전할매신당은 마을의 중심에 있어 가깝게 느껴진다. 경로당과 공연 무대도 있으니 주민들의 휴식 공간은 물론 공동체로서 함께 어우러지는 문화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나무 주위 작은 화단에는 매발톱, 옥잠화, 수호초, 둥굴레, 백리향이 넘실댄다.

이곳은 옛 서감마을이다. 서감마을은 감전동의 으뜸 마을로 서촌西村이라 불렀다. 동감 마을은 서감마을 동쪽에 있어 동감이라 불렀다. 강변 모래펄에는 재첩이 많이 잡혔다고 한다. 도시화되기 이전 이 일대는 모두 갈대밭이었고 그 중심에 서감마을이 있었다. 7월이면 밤마다 갈대밭에서 게잡이 횃불이 만들어 내는 장관을 볼 수 있는데 이를 사상팔경 중 칠월해화七月蟹火라 한다.

감전동은 세 가지가 많기로 유명하다. 물, 모래, 포플러나무이다. 포플러나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일본의 합성어 포프라마찌가 탄생하게 된 연유이다. 주민들은 괘내천으로 흐르는 주변으로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비가 오면 천이 넘쳐 물바다가 되어 주택은 침수하기 일쑤였다. 자구책으로 자라는 속도가 빠른 포플러나무를 하천의 양쪽으로 심었다. 비가 내려 물이 넘치려고 하면 마을 이장이 징을 쳐서 주민들을 깨웠다. 자다 일어난 주민들은 한밤중이라도 도끼와 톱을 들고나와 포플러나무를 베어 둑을 쌓았다.

예부터 사상은 동고서저의 지형이라 동쪽의 백양산에서 내려온 모래가 낙동강으로 흘러가며 쌓여 지형을 이룬 땅이다. 마당을 한 자만 파면 모래가 나온다고 하니 모래가 얼마나 많은 땅인지 알 수 있다. 감전 수문의 수위가 낙동강 수위보다 낮아 툭하면 넘치기 일쑤였다. 어른들이 낙동강 물을 보며 저건 안동 물이네, 저건 합천 물이네, 할 정도로 전날 비가 내린 지역에 따라 강물이 그대로 흘러들었다.

앉아 있는 동안 새댁이 유모차를 끌고 와 팽나무 아래에서 꽃들의 이름을 아이에게 들려주며 쉬었다 간다. 초로의 어르신이 지나가다 벤치에 앉아 백양산 바라보며 담배 한 개비 꺼내 문다. 예순을 넘은 여인이 시장 본 배낭을 내려놓고 뉴스를 화제 삼아 말을 붙인다.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이 없어도 소신껏 발언을 마치고 배낭을 메고 길을 떠난다.

누군가는 이곳을 부산의 변두리라고 한다. 하지만 그건 지난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감전동에는 부산의 하루를 여는 새벽시장이 있고 부산의 산업화를 이끈 크고 작은 공장들이 모여 있다. 오늘도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고 공장은 힘차게 돌아간다. 미래를 위한 크고 작은 계획들이 실현되고 있는 기운차게 살아가는 마을이다.

당산공원은 감전동 주민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진정한 생활문화 공간이다. 문화든 뭐든 현재의 삶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면 무용지물과 다를 바 없을 터, 감전마을에 감전할매신당을 모셔 놓은 당산공원이 제자리를 지키고 팽나무의 무성한 잎이 색을 더하여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니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상생의 광장임이 분명하다.

다가올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당산공원이 새롭게 변주되는 상상을 한다. 사랑을 갈구하는 청년의 함성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젊음의 기운을 팡팡 터트리며 노래하는 이곳, 엄마 손을 맞잡은 아이들이 꽃 이름을 외우고 오늘의 뉴스를 화제 삼아 누구나 얘기 나눌 수 있는 곳, 생기 가득히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몇 주 지나면 이 강좌도 막을 내린다. 지금처럼 자주 들르지는 못하겠지만 이 거리에 흥겨운 로큰롤이 쉼 없이 흘러나오기를 기대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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