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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강노랑 Aug 17. 2021

내게 가족이 무서운 이유 2

조금 긴 트라우마들

요즘 종종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는데 어떤 금쪽이가 저와 너무 닮아서 보는 내내 울어버렸습니다. 너무나 내 모습 같아서 그 아이가 받았을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기 때문에 더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다시 내가 학창 시절로 돌아가서 압박을 받는 느낌이 들어 다 보지 못하고 TV를 끄고 말았습니다. 그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오은영 박사님이 해주셨겠죠. 그때의 저에게도 주위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1명만 있었더라면 지독한 불신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엄마의 자살시도와 우울증, 성적 압박에 따른 심한 다툼들이 끝이라 생각했지만 잠시 심리상담을 받았을 때 저는 경제적인 부분에도 압박이 심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에도 저는 다들 그렇게 살겠지라는 생각이 남아있었던 겁니다.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제가 중학생이 될 때부터 우리 집의 경제 상황에 대해 알려주고는 했습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뭐 대단한 이유로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돌아보면 그저 푸념에 가까운 거 같습니다. 너를 낳아 기르면서 이만큼 우리가 희생을 하고 있고 너는 그걸 아주 잘 알아야 한다는 속뜻이 담겨있는지 모르고 매일 들어주고는 했습니다. 그 덕에 음료 하나 사 먹는 것도 눈치가 보였고 문제집과 볼펜을 살 때도 포기를 먼저 했던 거 같습니다. 물론 부모님은 저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지원을 받으며 저에게 늘 해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너를 위해 투자를 한 것이니 결과를 보여야 한다

그러나 결과는 부모님이 원하는 방향과 달랐고 그에 따른 다툼에선 늘 제게 경제적으로 힘들지만 네가 원해서 모두 해주었다고 했습니다. 글로 읽으면 눈물 나는 말이지만 당시 저는 계속해서 부모님께 우리가 돈이 많이 있는 것이 아니며 나는 원하는 것을 모두 할 수 없으니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 라는 얘기를 듣고 살았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들어서 사실 아직도 조금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들은 결국 저에게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돈 들인 만큼 달라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저는 너무 미안했습니다. 나중에는 이렇게 돈만 축내는(?) 딸인데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죠. 결국, 엄마와 저의 관계가 끝을 다가가면서 대학 입학 때에 입학금을 내주는 것에 대해 협박을 하면서 깨달았습니다. 나는 투자나 지원이 아닌 부모는 당연하게 자식들에게 어느 정도 경제적인 부양에 관해 의무가 있고 그거를 자식이 크면서 부모에게 돌려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입학금을 내는 마감 몇 시간 전까지도 내게 입학금을 내주지 않겠다는 협박 전화, 입학금을 빌미로 내게 하는 욕설들 그럼에도 서울에 있는 전문대학에 가야 하기 때문에 참았던 내가 미련했던 거 같습니다.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으면 남동생과는 좋을까요? 아니요. 정말 좋지 않습니다. 적어도 저는 남동생을 평생 보지 않고 살아도 상관없을 정도로 거의 남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남동생은 고집이 세고 늘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자기의 손해만을 가늠하는 성격이라 생각합니다. 남동생의 주변 지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에겐 적어도 남보다 못한 사이죠. 한창 부모님과 다투는 시기에 동생은 혼날 일을 해도 혼나지 않았습니다. 나와 다투느라 엄마가 지쳤다는 게 이유고 아빠는 동생을 말로만 타이르기 바쁘셨고 그로 인해 동생은 남다른 특혜(?)를 받고 살았다 생각합니다. 통금이 성인이 되어서도 존재하는 나와 달리 중학생 때부터 통금이 없었고 받은 용돈을 다 쓰고 달라고 해도 괜찮았고 공부에 대한 압박도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생의 성적이 하위권을 달려서 혼내도 저만큼 욕설을 하거나 때리진 않았습니다. 몸이 크고 나서 엄마와 저의 힘을 이기는 나이가 되어서는 어느 날 제게 욕설을 하며 문을 쾅 친 적이 있습니다. 동생이 제게 그냥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내가 이 집에 있으니까 계속 다투는 것이라고 얼른 집을 나가라는 얘기를 하는 동생과 문을 내려치며 욕설을 뱉는 그러한 행동들 모두 제겐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차라리 아무 말하지 말았으면 좀 달랐을까요. 그렇게 동생에게 큰소리에 대한 트라우마를 얻고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간 엄마와 동생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는데 아빠 얘기는 꺼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누구보다 가족이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안정적으로 있길 바라는 아빠는 엄마와 동생, 나 사이에 끼여서 매일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코로나 이전의 일이라 해외 출장도 마다하지 않고 가셨을 정도로 집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많이 컸습니다. 여태 아빠와 다투는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늘 큰소리로 다투고 매를 드는 엄마와 달리 아빠는 말로 점잖게 타이르는 편이었습니다. 아빠에게 맞아본 적이 엄마에 비해 많지는 않지만  그 기억들은 아빠가 더 강열했습니다. 처음엔 뺨을 맞았고 이후엔 다 같이 죽자며 날붙이를 들기도 하셨고 공원에서 저를 차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일어나서 또박또박 따지고 다시 맞기를 반복하고 엄마는 그 사이에 끼어 들어서 때리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이상한 상황들이 반복되었기에 횟수 자체는 많지 않지만 강열한 기억들이 지워지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가족이 무서운 이유에 대해 쓰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 우울감이 나에게서 벗어나지 않았고 적나라한 현실을 글로 적으니 더 초라해 보여서 쓴 글을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학창 시절로 돌아가길 원하지만 저는 끔찍한 그 지옥을 다시 겪고 싶지 않기에 나이를 먹어가는 지금이 행복합니다. 한 살씩 나이를 먹으면 그때의 일들이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날이 어느 날 생기겠죠. 그날은 무조건 맥주를 마시고 잘 겁니다. 평범한 가정이라 생각하지만 그 안을 엿보면 사실은 조금 특별한 가정일지도 모릅니다. 요새는 이러한 일들이 학대라는 것을 많이 알려졌기에 저도 조금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아닐 거라는 미련한 생각들이 아직도 떠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도 저는 그 시절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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