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인 문제
어느 날 알고 지내던 동기 A에게 전화가 왔다. 잘 지내냐는 안부 몇 마디 나누고 그는 힘들게 말문을 열었다. 돌려 돌려 어렵게 말을 꺼냈지만, 요지는 사정이 급하니 돈 좀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서로 얼굴은 알고 지냈지만 그 정도로 친한 친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 세상에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돈 이야기가 그리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2주 뒤면 돈이 나오는데 당장 생활비로 쓸 급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꼭 갚겠다고 했다. 몇 번을 다짐하듯 말하는 걸 듣고 나니 거절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생활비로 쓰겠다는데, 그리 크지도 않은 돈인데, 꼭 갚겠다는데, 진심이라는데, 나는 친구와는 돈거래하는 거 아니라는 통념을 깨고 그가 말한 돈의 절반을 송금했다. 나름대로 타협점을 찾은 결과였다.
그 후 우려했던바 대로 A에게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2주, 3주,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 기억에서도 잊혀버린 에피소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A에게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복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A는 또다시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돈을 또 빌려달라고? 아니 예전에 빌려간 건 모두 잊어버린 걸까. 값지도 않고 다시 또 돈을 빌려달라니. 이런 경우가 세상에 어디 있나. 이번엔 어쩔 수 없이 거절을 했다. 사정은 알겠으나 더 이상 돈거래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번 빌려간 돈은 받지 않을 테니까 모두 잊어버리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내 마음도 불편했지만,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친구에 대한 괘씸하고 분한 마음이 더 컸다. 친구가 느꼈을 서운한 마음은 이해는 하지만 나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시간이 흐르고 며칠 전 다른 친구 B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B는 어떤 친구에게 돈을 뜯겼다는 말을 전했다. 그놈이 하도 죽는소리를 하길래 대출까지 받아서 빌려주었는데, 지금은 함흥차사라고 했다. 누구인지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일을 겪고 나서 어느 친구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나 말고도 피해자가 한 두 명이 아니라고 나 보고 너도 조심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고 했다. B는 그 친구 이름을 서로 입에 올리지는 말자고 했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퇴직 후 국민연금 수령 시기까지 소득이 없거나 급격히 줄어드는 공백기를 소득 크레바스(Income Crevasse)라 하며 '소득 절벽'이라고도 부른다. 이 소득절벽은 한국의 법적 정년인 60세와 연금 수급 연령인 65세 간의 격차로 발생한다. 평균 50 초반에 일자리에서 퇴직하는 우리의 현실을 감안하면 약 15년간의 위험 기간이 형성된다. 15년. 15년이면 생각보다 너무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