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찌개
방학식날, 배를 깔고 엎드려 생활계획표를 만들면서
베란다 밖으로 저물어가는 노을을 보았던 기억.
그 기억엔 빨랫대 빨래들을 흔드는 바람이 내 손등 위로도 지나가고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엄마의 음식냄새가 가득이었다.
무언가 풍족하고 따스한 기분에
온 가족이 함께했으면 싶어서
"엄마, 아빠는 언제 와?" 물었더니
"아빠 오늘 일찍 오셔-" 라는 엄마의 대답.
그 순간, 햐아.... 완벽한 저녁이네- 싶은 충만함이 있었다.
별 것도 아닌데
늘 보던 노을이, 무심히 맞던 바람이, 때가 되면 풍겨오던 부엌의 내음이
어느날 문득, 특별한 추억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은
사는내내 의미가 되었다.
하복체육복을 개시해서 입고 나간 날, 허벅지로 스치던 싸늘한 바람.
소파 모서리에 앉아 책을 들고 앉으면 엄마가 가져다주던 딸기. 그 그릇위로 내리쬐던 햇살.
한겨율 아침일찍, 친구를 부르며 달려갈 때에 콧 속에 살얼음이 끼던 느낌.
막 햇살에 말린 여름이불 속에 들어가면 온 몸에 느껴지던 가슬가슬한 촉감.
비슷한 온도나 냄새, 햇살이나 상황을 마주칠 때마다
행복해, 라고 느끼게 해주던 기억들이다.
신기한건, 거창한 여행이나 대단한 이벤트가 아니다. 그저
늘상 겪어온 것들이 순간 아!라는 방점을 찍으면
그것이 나의 행복했던 모먼트가 되는 것이다.
워낙 한식입맛이던 우리 가족은
일주일 한두번은 꼭 된장찌개를 상에 올렸다.
고기와도 생선과도 잘 어울리고, 다른 반찬 없어도
두부와 감자를 수북히 떠서
밥에 쓱쓱 비벼먹으면
그게 그리 꿀맛이었다.
"너네 엄마 된장찌개가 왔다지!" 라는 아빠의 추임새는
과장이 없었다. 엄마 된장찌개만한 맛은
식당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 또한 여느 친구들처럼
새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으러 가자고 성화를 부리기도 하고,
쉬이 먹어보지 못한 메뉴들에 호기심을 보이며
된장찌개같이 아무때나 먹을 수 있던 엄마의 음식들을
시시하다 지루하다 등한시했던 시기가 오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빡빡한 일정에 당췌 집에서 밥을 먹을 틈이 없었던 신입사원 시절,
늘 그랬듯 아침은 건너뛰고 부랴부랴 나갈 준비를 하는 내게
"밥 한 술이라도 뜨고 가지?"
엄마가 방문을 슬쩍 열고 물었다.
보통은 "안돼, 시간없어." 퉁명스러웠을 내가
그 날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지금 얼른 먹을 수 있어?" 라고 대꾸했다.
정말 어느 틈에 준비를 했는지
바람처럼 한 상을 차려낸 엄마가
화장대에 앉아 허둥대는 내 앞에
떡 하니 아침을 가져다 주었다.
된장찌개, 구운소고기, 김치, 소복한 밥.
특별할 것 없는 메뉴와 조합이었다.
가장 자주 접했던 일상적인 한 끼였다.
그런데
아, 이보다 더 맛있을 수는 없었다.
오랜만의 집밥이어서인지,
혹은
그 짧은 순간에
새로운 뚝배기에 찌개를 데우고
구운 고기를 주물팬에 올려내었을
엄마의 마음이 느껴져인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부랴부랴 차려준 걸로도 모자라
쌀쌀맞은 딸래미가 대충 먹고 나가버릴까봐
맛있어라 맛있어라 바라는 눈빛으로 내 곁에 앉아있는 엄마에게
그 날따라 미안한 맘이 들어서였을지도.
그 한 상은 그 날부로
나의 영원한 소울푸드가 되었다.
늘상 먹던 엄마의 된장찌개가
그 어떤 특식보다 특별해지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허기가 몰려오거나, 마음이 쓸쓸해지는 날이면
주섬주섬 뚝배기와 주물팬을 꺼내들고
그 날의 메뉴와 꼭 같이 만들어 먹곤 한다.
그러면 그 아침에 그랬듯
하루를 씩씩하게 만날 힘이 솟는다.
그 날 탄생한 나의 소울푸드는 여전히
내 인생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며
바짝 긴장하고 산 시기가 있었다.
눈깜짝할 새 자란다는 아이들 시간을
멋지고 근사한 경험들로 가득 채워주고 싶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는 한맺힌 엄마마냥
소위 '영끌육아'를 해가며 산이고 바다로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겠다 바등대던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큰 맘 먹고 간 여행이나, 온 몸이 부서져라 놀아줬던 날은
기억이 가물대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저녁을 먹고나면 종종대며 함께 산책로를 걷던 기억,
매일 샤워 전 욕실에서 물감놀이를 하던 루틴,
잠들기 전 함깨 했던 책읽는 시간들이
아이들에게 더 깊이 새겨져 있다.
비슷한 상황을 만날 때마다 아이들은
"엄마, 우리도 그랬었잖아!" 라며
잔뜩 행복한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본다.
이제는 안다.
특별한 경험은 기억으로는 남겠으나, 소울모먼트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근사한 레스토랑이나 줄서서 먹는다는 맛집의 음식은
소울푸드가 될 수 없듯이,
투박하지만 일상에 녹아있던 엄마의 된장찌개처럼
소울모먼트는 늘 그 곳에 있던 것들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새삼 행복하게 느끼는 순간인 것이다.
오늘, 학교에서 돌아와
"30분만 엄마랑 수다 떨고 숙제 할래!" 라며
내 앞에 마주앉아 종알종알 딸기를 먹는 둘째를 보면서
이 순간이 네게는 소울모먼트가 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조금 더 다정한 눈빛으로
열심히 귀를 기울이며 이야기를 들어준다.
다소 투덜대는 투정에도
"그래 그럴 수 있지, 엄마도 너만할 땐 그랬지." 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준다.
거창하고 대단한 엄마가 되려고 너무 애쓰는 것을 멈추고,
별 일 없는 매일을 귀하게 여겨야겠다.
아이들에게 언제 찾아올 지 모르는 소울모먼트를 위해
평범한 하루들을 잘 가꿔 나가야겠다.
너무 거창한 메뉴들에 욕심내지 말고,
별다를바 없는 한 끼에도 마음을 담아내야겠다.
아이들의 마음이
더 많은 소울모먼트를 발견해주길 바란다.
엄마표 된장찌개 정식이
그 날 나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는 것처럼
아이들에게도 세상을 마주할 용기를 주는
소울모먼트가, 소울푸드가 가득하길 바라본다.
된장찌개
사실, 된장찌개만큼 많은 한국인이 꼽는 소울푸드가 또 있을까요. 김치만큼이나 집집마다 맛이 다른 된장찌개는 된장의 비율만으로도 맛이 달라집니다. 저희집은 시골에서 주문해먹는 재래된장과 시판된장을 2:1 정도로 섞어 먹어요. 저나 남편은 재래된장을 더 좋아하지만 아이들은 시판된장을 적당히 넣어주는 것을 더 선호하더군요.
1. 된장을 들기름에 살짝 볶아줍니다. 잘 섞여 스며들 정도로만 볶으면 됩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 된장이 훨씬 구수해지고 깊어집니다.)
2. 멸치육수를 붓고 감자부터 넣어 끓입니다.
3. 적당히 끓어오르면 버섯, 애호박, 두부, 대파, 다진마늘, 고춧가루 조금을 넣고 조금 더 끓여주세요. (저는 찌개나 국을 진하게 우러내어 먹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꽤 오랜시간 끓인답니다.)
4. 청양고추를 마지막에 넣어 한소끔만 더 끓여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