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둘 권태형에게 묻다.
내 주변 가까이, 삶의 근육을 기르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루업(GREW-UP).
세 번째 주인공은, '찌질이'라는 단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서른두 살의 권태형님입니다. 모두가 우습게 생각하는 단어 뒤편, 아무도 모르게 따스하고 반짝거리는 틈새를 알아차리는 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안녕하세요. 태형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름 권태형. 89년생. 올해로 서른둘. 전형적인 찌질이 아싸 스타일. 참 찌질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저는 저의 찌질함이 부끄럽지 않아요. 찌질함의 유니크함이랄까? 무언가를 바라볼 때, 대다수의 입장이 아닌 비주류의 시선으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틈새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임팩트 있는 자기소개 감사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태형님. 태형님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시나요.
평일은 정말 똑같아요. 집-회사, 집-회사. 지금 다니는 회사는 광고 회사인데, 그러다 보니 직종 특성상 퇴근이 늦는 경우가 왕왕 있어요. 퇴근 후엔 딱히 친구도 많이 없고 여자 친구도 없기 때문에 바로 집에 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집에 도착해선 주로 유튜브를 보다 잠이 들어요. 그냥 그렇게 남들과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직장인의 하루 일과는 대부분 비슷하죠. 작은 활력소라도 있어야 일상을 조금이라도 버텨낼 수 있는 것 같아요. 태형님은 매일 똑같은 일상 속 활력소가 있나요?
최근에는 원데이 클래스를 하러 다니고 있어요. 지난주에는 체스를 배웠고, 이번 주에는 클라이밍을 했어요.
이번 주말에도 원래는 그림을 배우려고 했는데, 사정이 있어서 다음 주로 미루기로 했어요. 원데이 클래스를 하는 이유는 별거 없어요.
최근 몇 년간은 한번 시작하면 최소 3달은 해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게 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무언가를 시작하는 게 매번 어렵더라고요. 매일 집에만 있으면서 뒹굴뒹굴했죠. 어느 순간 유튜브를 보는 것도 넷플릭스를 보는 것도, 게임하는 것도 지겨워지더라고요. 인생이 재미없으니 이제 ‘뭐라도 해야겠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스스로 안 해 볼 만한 걸 찾다 체스 클래스를 신청했죠. 뭐라도 해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들었던 체스 수업, 그런데 의외로 체스에 재능이 있었어요. 강사님에게 룰을 배우고, 같은 반 사람들과 체스를 두는데 제가 계속 이기더라고요. 그렇게 계속 이기다 보니 제가 그 반에서 가장 체스를 잘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니, 기분도 좋고 새로운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이전의 내가 생각났죠. 저는 과거에 ‘모든 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던 경험주의자였거든요. 언제부터일까요?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스스로 일상 속 작은 도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더라고요.
그런데 체스를 시작하고 그런 마음가짐이 들었어요. ‘굳이 오래 할 필요 없어! 그냥 한번 해보자’는 생각 말이에요. 그렇게 요즘에는 무엇이든 꾸준하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인생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느껴보려 노력하고 있어요. 클라이밍, 유화, 도자기, 베이킹, 비인기 스포츠 등… 한 번씩 시도해보고 있고,
앞으로도 그래 볼 생각입니다.
경험주의자. 멋진 단어예요. 태형님의 취미가 궁금해지는데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매번 할 말이 없어요. 취미가 없거든요. 뭐라도 건져 보는 심정으로 이 질문을 받고 네이버에서 취미의 정의를 검색해봤어요.
‘즐기기 위하여 하는 것’ 저처럼 취미 없는 사람에게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아요. 즐기기만 하면 누워서 숨쉬기도, 유튜브 보는 것도 모두 취미니까. 그런 의미라면 저는 매 순간 많은 취미를 가지고 있네요.
뜬금없이 용산 가족공원 가 누워 있는 것을 즐기기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해요. 가끔은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지금 쓰는 글같이 아무 생각이 나 휘갈기곤 해요. 또 어떤 때는, 당근 마켓을 보면서 득템 할 것은 없나 눈팅을 하기도 하죠. 쓰고 나니 저 취미 많네요!
즐기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모두 취미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태형님은 뭐든 생각을 깊이 하시는 분 같아요. 문득 태형님의 살아온 인생 이야기가 궁금해지는데요.
유년시절
서울에서 태어났어요. 유년 시절 춘천 의암리에 이사를 왔었는데, 전교생이 60명 남짓한 조그마한 학교에 다니며 친구들과 즐거운 추억들을 많이 쌓았어요. 그때가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죠. 매일 같이 친구들하고 놀았던 기억만 나요. 이 시절엔 여러 가지 운동도 많이 해보았는데, 스케이트 대표도 나가보고 (물론 꼴찌) 높이 뛰기 대표도 나가보고 (이것도 꼴찌) 태권도 대표로도 나갔어요. (이건 동메달을 땄어요. 한번 이겼더니 동메달이었죠.) 학교가 작아 가능한 일이었어요. 형 친구들과 버려진 곳인 줄 알고 부도난 공사장 함바집을 털다 단체로 혼난 기억도 있네요.
10대
내 인생의 암흑기. 중학교 3학년 이후로 성격이 갑자기 조용해지고 암울해지면서 한마디로 상 찌질 했어요. 괴롭힘도 당했죠. 그래서 남들이 다시 한번쯤 돌아가고 싶다는 10대의 기억은 많이 없어요. 그냥 잊고 싶은 기억이었나 봅니다.
20대
10대 때 하도 찌질하게 다녀서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친구랑 무전여행을 가고, 어울리지 않는 농구 소모임과 여행 동아리에 가입했어요. 술도 잘 못 마시면서 술을 가장 많이 먹었던 시절이었죠. 충무로에 가면 그 술집엔 맨날 네가 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말이에요.
행사도 기획했는데 야무지게 말아먹었어요. 영화 상영회였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말아먹었는데도 재미있었어요. 낯도 엄청 가리면서 사람 만나는 게 좋아서 대외 활동도 많이 했어요. 아싸로써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했던 스무 살, 스물한 살이었죠. 그러곤 군대에 갔어요. 제대 후엔 열심히 돈을 모았죠. 돈을 모아서 외국을 가고 싶었거든요. 열심히 일해서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갔어요. 캐나다의 여유로운 일상을 즐겨봤던 일 년이었어요.
그리곤 캐나다, 유럽, 남미를 여행했어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몸소 느낄 정도로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3개월이었어요. 여행 후엔 한국에 돌아왔는데, 영어는 하나도 늘지 않아서 좀 창피한 거 있죠. 그래서 교환학생을 갔어요. 첫 학기는 그룹 내 찌질이었어요. 그런데 다음 학기는 모두가 저와 놀고 싶어 했어요. 셀럽이 된 거죠! 정말 신나게 놀았어요. 그리고 이때 나이가 딱 스물일곱이었네요.
이쯤 되니 취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와 취업을 준비했죠. 취업 시즌 1년~2년은 최악이었어요. 그동안 너무 즐겁게 놀아서, 이제는 바닥에 가라앉는 시기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래도 여찌저찌 하나투어라는 곳에 입사하게 됐어요. 어느 정도 중견기업이었지만 전부터 가고 싶었던 광고 회사엔 가지 못했고, 일도 재미없어 다니면서도 암울했었어요.
30대
그렇게 지내다가,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코바코에서 진행하는 광고 수업을 들으러 갔어요. 하나투어에 다니면서도 광고 바닥에 기웃거리다 보니, 기회가 찾아오더라고요. 그 당시 직장 상사의 친구분이 광고 회사에 다니시는 분이셨고, 저를 광고 회사에 추천을 해주셨어요. 곧장 다 포기하고 광고 회사로 직행했죠.
그런데 이직한 광고 회사에서 제 인생 최악의 인물을 만났어요. 잘못하면, 아니 잘못하지 않아도 3~4시간씩 저를 혼내는 사람을 상사로 만난 거였죠. 알고 보니 광고 미디어 쪽에서 악명이 높은 사람이더라고요.
진짜 이를 악물고 6개월을 버티다 역류성 식도염에, 공황장애 초기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정말 이대로 죽겠다 싶어 퇴사했죠. 몇 달을 백수로 지내다 지금 광고 회사로 이직을 했어요. 지금 회사도 초반엔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다니는 편이에요. 생각해 보니 광고 회사를 가고 싶어 했던 저의 꿈이 이루어졌네요.
*코바코 :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덤덤하게 이야기해 주셨지만, 왠지 이 시간을 살아온 태형님의 감정이 곳곳에 묻어나는 것 같아요. 내 인생의 타임라인 중 가장 찬란한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은 어느 때일까요?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 순간을 뽑자면 20대 시절 떠났던 남미 여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페루 와이나 픽추에 올라 가 교과서에나 보던 광경이 내 앞에 펼쳐질 때 그 짜릿함은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건 그때의 짜릿함은 그저 풍경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어요. 이 장면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 내가 스스로 돈을 벌어 이곳에 왔다는 자랑스러움. 적어도 내 주변에 아무도 가지 않은 곳에 왔다는 성취감. 앞으로 날 기다리는 여행에 대한 기대감. 복합적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던 순간이었어요.
그렇다면 반대로 인생에서 가장 버거웠던 순간은 언제셨나요. 인생의 암흑기라고 말했던 10대? 가장 최악의 인물을 만났던 신입 시절?
사실 전 스물일곱 이후 취업 시즌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었어요. 찌질 했던, 그래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10대 시절보다 취준 시기가 더 힘들다고 느낀 건 나 자신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잃었던 시기였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스무 살 무렵부턴 하고 싶은 것들은 하며 살았고, 대부분 내가 원하는 걸 현실에 이뤘어요.
그런데 취업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취업문 앞에서 몇 번이나 고배를 마시다 보니 어느 순간 부정적이고 매사에 신경질적이게 되는 저를 보게 돼더라고요. 돌이켜보니 남들은 다 대기업을 가고 취업을 잘하는데 왜 난 하지 못할까라고 생각했어요. 나에 대한 의심과 질책을 끊임없이 하다 보니 힘들었던 거죠.
나에 대한 의심과 질책을 스스로 던지고 있을 때 정말 힘이 들죠. 그 시간을 태형님은 어떻게 버티셨을까요.
어떨 때에는 정면 승부, 어떨 때엔 피하고, 어떨 때에는 버텨내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취준 때에는 저 세 가지를 모두 다했어요. 취업 스트레스 피한다고 여행을 가기도 하고, 정면 승부로 맞선 적도 있었어요. 그것마저 잘 안될 땐 버티기로 혼자 묵묵히 취업을 준비한 적도 있었죠. 그냥 그때의 기분과 상황에 맞춰 대처 방법이 달랐던 거 같아요. 이 방법들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틀린 방법은 아닐 거라 생각해요.
어떨 때에는 정면 승부, 어떨 때엔 피하고,
어떨 때에는 버텨내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맞아요. 세상에 정답은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형님이 지금까지의 시간을 버텨내며 얻어 낸 삶의 근육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요.
힘든 순간이 오면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이것 또한 지나가리?’이건 개소리라고 생각해요. 당사자도 알죠. 이것 또한 지나가는 사실을. 하지만 알아도 힘든 건 힘든 거예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다 때려치우고 싶고, 건물주 되고 싶고, 비트코인 대박 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잖아요. 하지만 난 지금 당장 못하니까. 그러니 그냥 어쩔 수 없이, 엄청나게 힘들면서도 버티는 거죠.
한마디로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포기라고 해야 하나.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인생을 버티는 하체 근육이라면, 희망을 생각하고 미래를 바라보게 하는 머리의 근육은 꿈이라고 생각해요.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겠다는 꿈. 해외에서 살아보겠다는 꿈. 광고 회사를 가겠다는 꿈. 어릴 적부터 이루고 싶었던 꿈 들이었어요. 그 꿈들은 꿈으로만 남지 않았어요. 시간이 걸릴지라도 현실이 되었죠. 어느 정도 인생에서 증명이 되다 보니 꿈을 꾸고 계속 생각만 하는 것으로도 언젠간 이루어질 것이라고 내심 믿고 있어요.
그리고 이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조금씩이라도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삶을 버텨내는 근육이 있기에 생각을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근육을 쓸 수 있다. 정말 와닿네요. 그렇다면 태형님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행복이요. 남도 아닌 내 인생의 행복.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 매일 생각해요.
내가 광고 회사에 다니는 게 행복한 일인가? 지금 책을 읽는 게 나를 위해 행복한 일인가? 하면서요.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집중하며 행복의 중심을 찾으려고 매일 노력하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고민할 거 같아요.
행복. 그리고 끊임없이 나는 행복한가?를 묻는 태형님은 그래 왔듯 행복을 찾으실 것 같아요. 벌써 마지막 질문이네요. 태형님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문장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할 것 없으니까. 그거라도 해라.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을 볼 때 저 문장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어요. 캐나다 워킹 홀리데이 때도, 브런치를 썼을 때도, 광고 회사 이직을 했을 때도.. 저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할 것도 없는데 그거라도 하자.’
할 것도 없는데 캐나다 가자.
할 것도 없으니까 브런치 하자.
하나투어에서 할 것도 없으니까 광고 회사로 이직하자!
뭐라도 하니까 되긴 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할 때 삶을 버텨내는 근육이 생겨요.
몸을 지탱하는 다리가 있어야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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