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모세와 나눈 철학산책
모세: 아빠, 바오밥 나무가 5천 년을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한 자리에서 그렇게 오래 살면 정말 지루하지 않을까? 움직이지도 못하고 한 자리에서 5천 년이라니... 생각만 해도 답답할 것 같아.
나: 모세야, 그게 말이지.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런 삶이 지옥 같아 보일 수도 있겠지. 한 자리에 뿌리 내리고 5천 년을 견딘다니.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뭐냐면, 자연은 시간 개념이 없다는 거야.
모세: 시간 개념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야?
나: 하루살이를 생각해 봐. 하루살이가 "아, 나는 하루밖에 못 살아서 참 의미 없는 존재구나"라고 생각하겠니? 그렇지 않아. 찰나생, 찰나멸하는 그 순간에 번쩍이는 찬란한 몸짓, 생명결합이 일어나든 뭔가 상호작용하면서 펼쳐지는 에너지 떨림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시간을 "나는 얼마나 살았으니까 더 가치 있어"라고 인식하지 않아. 매 순간밖에는 없거든.
모세: 그럼 바오밥 나무도 자기가 5천 년을 살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다는 거네?
나: 그렇지! 입자의 속성이 그래. 입자라고 하는 건 매 순간 번쩍하고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 밖에는 없어. 우리도 마찬가지야. 우리 몸의 단백질 입체 구조는 1초에 100억 번씩 바뀌고 있어. 그 말은 우리는 1초에 100억 번씩 다른 모양으로 계속 바뀌고 있는 존재라는 거지.
모세: 와, 그렇게 빨리? 그럼 어떻게 우리는 우리가 계속 같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거야?
나: 그게 바로 인간이 만든 착각이야. 우리는 "나는 항상 유지되고 있고, 나는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지. 이건 인간이 의미를 지어낸 하나의 관점일 뿐이야. 100억 번 떨든, 100년을 살든, 긴 세월이라는 것들을 우리가 쭉 연결해서 파동의 관점에서 전체를 연결하고 운동량을 측정해서 연결된 존재로 나를 보는 거지. 그런데 이건 명사적 관점이 아니야.
모세: 명사적 관점이?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쉽게 말하면, 우리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의 자신을 하나로 연결시켜서 보기 때문에 "나는 존재하고 살아냈다"라고 하는 거야. 하지만 실제로는 오늘의 나와 20년 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고 별개의 존재야. 50년 후의 나도 지금의 나와 전혀 관계없는 또 다른 존재가 될 거고. 우리가 이걸 다 연결해서 '나'라고 부르는 건 사실은 허상이야.
모세: 음... 그럼 우리는 계속 변하고 있는데 그걸 하나로 연결해서 '나'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거구나?
나: 정확해! 입자는 연속되지 않고 각자 정지된 상태에서 한 순간밖에 없는 거야. 양자 물리학에서 말하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이걸 설명해주지. 입자는 위치값을 가지고, 파동은 운동량을 가지는데,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거야.
모세: 불확정성 원리? 그게 우리 삶과 무슨 관계가 있어?
나: 입자를 측정하는 순간, 정지된 한 장면 속에 딱 고정된 그 순간만 위치값을 측정할 수 있어. 그 순간 멈춰진 상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운동량은 측정할 수 없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지, 그 운동량은 알 수 없어. 반대로 파동을 관측하면 운동량은 알 수 있지만 어느 한 순간의 위치값은 측정할 수 없고. 둘 중 하나만 알 수 있다는 거지.
모세: 그럼 우리가 "몇 년을 살았다"고 말하는 건 어떤 관점에서 보는 거야?
나: 우리가 "몇 년을 살았다", "오래 살았구나"라고 느끼는 건 우리가 명사적 관점에서 보는 게 아니라 동사적 관점에서 보고 있는 거야. 고정된 하나의 실체로서 드러난 입자적 상태가 아니라, 계속 변화하는 파동으로서의 나를 보는 거지.
모세: 그럼 바오밥 나무는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나: 바오밥 나무는 우리처럼 시간을 선형적으로 경험하지 않아. 그 나무에게는 5천 년이든 5억 년이든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 자체가 없어. 그냥 매 순간 존재할 뿐이야. "나는 지금 이 순간 이것으로 존재하고 있어요." 이게 전부지. 바오밥 나무라는 이름도 우리 인간이 붙인 거고, 5천 년 살았다는 것도 인간의 관점에서 본 거야.
모세: 그럼 자연은 시간에 묶이지 않아서 자유롭네?
나: 그렇지! 노자 도덕경에서 자연을 천장지구(天長地久)라고 표현했어. 자연은 스스로 이름을 붙이거나 의미를 부여하거나 "내가 존재한다"라는 인식을 하지 않아. 자기를 어떤 하나의 상으로 규정짓지 않기 때문에 자연은 영원하게 존재할 수 있는 거야. "나는 항상 이래야 된다"는 개념이 없으니까 5천 년이든 5억 년이든 살아도 그런 생각 자체가 없는 거지.
모세: 그런데 우리 인간은 다르네?
나: 맞아. 우리 인간은 "나는 항상 이래야 된다"는 자기 상을 늘 만들어. 그래서 "쟤는 왜 저럴까", "나는 왜 이럴까" 하면서 비교하고, 자기가 만든 개념이나 의미에 맞지 않으면 잘못됐다고 고민하고, 맞으면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일희일비하지. 매 순간을 격렬하게 살아내지 못하고 의미를 계속 붙이면서 "나는 이렇게 살았다"는 서사를 만드는 거야.
모세: 그럼 이런 식으로 계속 다른 의미를 부여하면서 사는 건 마치 여러 개의 평행 우주를 경험하는 것 같네?
나: 정확히 그거야! 완전히 다른 우주 속에, 평행 우주 속에 또 다른 나를 만나고 오는 것처럼 느껴져. 한 번은 이런 의미로 내 삶을 보다가, 또 다른 의미를 지으면 완전히 다른 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이런 세상 속에서 수많은 '나'들을 만들어내고, 때로는 영화 같은 인생을 살기도 하고, 때로는 한 순간에 머물러 그것만 무한 반복하는 루프에 빠진 것 같은 지옥 속에 있다고 느끼기도 해. 이 과정을 우리는 계속 반복하고 있는 거지.
모세: 그렇게 보면 시간이라는 건 정말 상대적인 것 같아. 바오밥 나무를 보면서 우리 삶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네.
나: 그래, 모세야. 한 자리에 서서 5천 년을 사는 바오밥 나무를 생각하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스스로를 가두는지 깨닫게 돼. 우리는 시간이라는 개념에 우리 자신을 가두고,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를 같은 존재로 연결시키면서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가지.
하지만 바오밥 나무가 알려주는 시간의 그림자는 그저 매 순간 자신을 온전히 존재하게 하는 것, 그것이 영원함의 비밀이라는 거야.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우리도 시간에 묶인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존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