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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을꾸다 Oct 25. 2023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그 나이를 퍼 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남편이 아이를 재우러 들어갔다. 저녁 9시. 덕분에 예전에 비하면 매우 이른 시간에 육아 퇴근을 했다. 넉넉잡아 자정에 잠을 잔다면 3시간의 자유가 생겼다. 할 일도 눈에 가득 들어왔지만,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글도 쓰고 싶고, 블로그 포스팅도 하고 싶고, 요가도 하고 싶고, 달리기도 하고 싶고, 유튜브도 보고 싶고, 책도 읽고 싶고, 코바늘 뜨개질도 하고 싶고, 영어 공부도 하고 싶고, 사진 정리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게 많은 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뜻과 같았다. 무엇부터 해볼까 생각만 하다가 너무 의욕이 앞선 탓인지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녁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내 손에서 휴대전화는 떠나지 않았고, 딱히 무언가 읽는 것도 보는 것도 아닌 상태로 눈만 뜨고 있었다. 마음이 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몸이 편한 것도 아닌 그런 상태. 말 그대로 시간만 날리고 있었다. 남편은 나에게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며 잘 쉬고 있는 거라고 말했다. 그동안 일과 시간 후에도 무언가 바삐 움직여왔으니, 조금 쉴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쉬는 것은 쉰다는 느낌보다는 시간을 낭비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면 시간을 허비했다는 후회만 남을 뿐, 잘 쉬었다는 개운한 맛이 없다. 그러나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가끔 이런 날이 있다.


다음날이 되었다. 눈을 떴는데 여전히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올해 달리기를 시작하고 깨달은 점이 있다. 이런 순간에는 달려야 한다. 그래서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서둘러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러닝화를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 순간부터 해방감이 들었다. 일단 달렸다. 달리면서도 '불안은 사라질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하지현 신경정신과 교수님 강의를 유튜브로 들었다. 나는 자주 불안했다. 아니, 늘 불안했다. 강의를 들으면서 깨달았다. 내가 생각하는 정상의 범위는 너무나 좁았고,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고민이라는 비용을 내며 살고 있었다. 그동안 왜 짜증이 났고 마음이 힘들었는가에 대한 답을 얻은 느낌이었다. 짜증이 난다는 자체가 나를 쉬게 하려는 내 몸의 신호라는 말씀이 묘하게 위로가 됐다.



갑자기 하게 된 미국 생활, 아이가 커갈수록 새롭게 던져지는 고민과 미션, 언젠가 하게 될 복직 후의 삶, 부모님과 우리 부부의 노후, 아이의 미래 등 현실과 미래를 넘나들며 불안을 키우고 있었다. 수시로 밀려드는 걱정과 불안 속에서 몸과 마음은 휴식이 필요했다. 그런 순간에 그저 물결을 타고 둥둥 떠다니는 나뭇잎처럼 멍하니 침대 위에 누워있을 뿐이었다. 


그 뒤 죄책감과 후회, 아쉬움이 밀려드는 것은 그 시간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혹은 욕망이었다. 욕구(요구)와 욕망을 구분하지 못하고, 채워지지 욕망으로도 불안을 느낀다는 말씀이 강하게 와닿았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니 채워지지도 않았다. 그것이 욕망인지 욕구(요구) 인지도 모른 채로 불안을 없애려는 노력만 해왔다. 강의를 듣고 보니 그런 노력들이 오히려 불안을 키우는 불쏘시개였다.


눈 뜨자마자, 걷고 달리고 영상을 들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곤히 자는 아이를 깨우면서 오늘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 육아에 지치던 순간, 그냥 일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일과 중에 할 일만 딱 끝내고 퇴근하고 나면 여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던 날들. 어딘가에 속해있어도 자율성도 존중되던 날들이 그리웠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면 지금도 사무치게 그리워지지 않을까. 아무 걱정 없이 아이만 돌볼 수 있고, 아이에게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날들. 아이와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날들이 그리워지겠지. 그러니 육아도 일도 할 수 있는 그 순간에 묵묵히 즐기며 살아가는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나도 잘 모른다. 그래서 남편에게도 아이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무언가를 바랄 수 없다. 또한 누가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그 상황 혹은 욕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는가의 문제이다. 마음이 답답하면 몸을 움직여서 잠시 생각을 돌린다거나, 몸이 힘들면 아무 생각 없이 누워서 편히 쉬는 것. 그때그때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귀를 기울일 여유만 있으면 된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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