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과 완벽 그 사이에 서 있습니다.
충분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모자람이 없어 넉넉하다.’이다. 빈틈없이 가득 채워지지 않아도, 부족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뜻이다. 물 잔이 있고, 거기에 절반의 물이 담겨 있다. ‘물이 반이나 남았네.’와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네.’라는 관점 차이에서도 충분과 부족을 떠올릴 수 있다. 물 잔이 가득 차 있지 않더라도 우리가 어떤 상황이나 마음인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만큼은 충분하다면, 절반의 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절반이 아니라 가득 차 있더라도 물이 한 잔밖에 없다며 투덜거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물 잔의 개수도 물의 양도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관점, 상황이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 더딘 성장과 변화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이 말을 위로로 건네곤 한다. 100점이 아니라 60점이나 70점만 되어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정말 그런 걸까. 100점, 즉 완벽을 목표로 하면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완벽은 흠이 없는 완전한 옥구슬이란 뜻으로, 아무 흠이 없이 완전히 뛰어남을 말한다. 충분함이 아니라 완벽함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작은 흠집, 미세한 틈, 부족한 결과 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전에 직장 동료가 나에게 말했다. 누가 봐도 허술하고 빈틈이 가득한 사람인데, 완벽한 사람이려고 애쓰는 게 보인다고. 절반의 물에 만족하지 못하고, 물을 더 채우려고 채찍질하는 사람이 나였다. 그 정도면 괜찮다는 말이 충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완벽, 100점이 되고 싶었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도 그런 마음이 자주 든다는 게 내 육아의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이다.
완벽한 육아, 100점 육아를 할 수 있을까? 애당초 그런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육아도 업무 하던 때처럼 완벽해지고 싶었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낄수록 아이도 나도 행복할 수 없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 모자라고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더 채우려고 애썼고, 완벽하게 하려고 버둥거렸다. 갯벌이나 늪에 빠졌을 때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리고 힘을 쓸수록 더 깊이 빠져든다고 한다. 오히려 힘을 빼고 몸을 눕혀서 배영을 해서 나오거나 엎드려서 기어 나오면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육아 고민의 늪에서 힘 빼는 방법을 몰랐기에 한없이 늪으로 빠져들었다. 곁에서 바라보는 남편도 힘들었고, 늪에 빠진 엄마와 함께 하는 아이도 힘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가장 힘든 사람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라고 생각했다.
아이와 관련된 모든 것에 예민했다. 먹는 것을 고르는 것도, 노는 환경을 정리하는 것도,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잘하고 싶었다.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아이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았다. 남편은 연신 소독하고 닦고 치우는 나에게 아이를 무균실에서 키울 거냐고 말했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고 면역력이 생기려면 적절한 노출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남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정하기 싫었다. 애쓰는 나를 비난한다고만 느꼈다. 얼마나 삐뚤고 모가 난 마음이란 말인가. 남편의 충분함과 나의 완벽함, 두 사람의 성격 차이를 좁혀 가고 맞춰가는 일도 부모가 되는 숙제였다. 우리는 정말 달랐고, 나는 달라지고 싶었다.
육아하는 내내 작은 실수에도 죄책감이 컸고, 전부 해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컸다. 아이가 우는 것도 내 탓 같고, 잘 자지 않는 것도 내 탓 같았다. 모조리 내 탓. 그러니 육아는 매일 어려웠다. 남들은 다 쉽게 혹은 즐겁게 하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러고 있나 싶은 자괴감이 더욱 깊이 늪으로 끌어당겼다. 바쁜 남편도 원망스럽고, 잘 먹고 잘 자지 않는 아이도 미웠다. 내 일상은 온통 부족함으로 가득했다. 완벽을 꿈꿀수록 부족함만 더해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렇게 충분함은 나와 거리가 먼 단어가 되어 있었다.
완벽함의 늪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어느 날 책을 읽다가 아이에게 필요한 건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 충분한 엄마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도널드 위니컷이 말한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도 알게 됐다. 아이와 내가 다름을 인정하고 독립성을 지켜주되, 적극적으로 공감해 주는 엄마. 아이에게 지지적이고 안정적인 환경이 되어주는 엄마. 적절한 좌절과 결핍을 토대로 자율성과 주도성을 길러주는 엄마. 나는 어떤 엄마였는지 돌아보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하면 된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완벽해지고 싶어서 애쓰는 엄마. 아이와 나를 하나처럼 생각하는 엄마. 부서질까 깨질까 조심히 대하느라 아이를 감싸기만 하는 엄마. 아이를 믿고 기다려주지 못하는 엄마. 그런 엄마였다.
아이가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깨달았다. 아이도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 충분한 엄마를 원한다는 것을. 그동안 아이를 위해 해준다고 생각했던 일이나 그런 일을 하면서 받았던 스트레스는 아이를 위한 게 아니었다. 결국,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다. 때로는 애써서 무언가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엄마가 화내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힘들어하지 않기를 원했다. 육아에 지쳐 표정이 굳어가고 표현이 거칠어질수록 아이 마음에도 생채기가 생겼다. 아이는 ’ 엄마‘면 충분했다. 자기 옆에 엄마가 있고, 같이 먹고 놀고 자면 그걸로 충분했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면 충분함을 느끼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 이거면 됐지.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지. 이런 말이 나의 입과 머리에서도 나오기 시작했다.
잘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자.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하기만 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니야. 매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해. 충분히 좋은 엄마야. 밥만 주는 게 아니라 반찬도 주고 국도 주고 후식도 주고 간식도 주고. 잠만 재우는 게 아니라 책도 읽어주고 자장가도 불러주고 다리도 주물러주고. 같이 있어 주면서도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만들기도 하고 산책도 하고. 아이와 하는 모든 일이 이미 충분했다. 숨 쉬듯 매일 하는 일을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돌아보니, 정말 모자람이 없이 넉넉했다. 무언가를 더 채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가득했다.
은사님, 시어머님, 남편, 절친 등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나에게 종종 하는 말이 떠오른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모든 걸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완벽해지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만하면 충분해. 지금도 충분해. 충분히 잘하고 있어. 괜찮아, 괜찮아. 내 곁에서 오랜 시간 나를 지켜보며 나의 성격을 아는 이들이 해주는 말들. 버둥거리는 내가 스르륵 힘을 빼고 나올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믿어주는 고마운 사람들. 그 사람들이 있었기에 완벽함이 아니라 충분함의 힘을 믿을 수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글을 쓰면서도 수시로 자기 검열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써도 괜찮을까. 이런 글을 공개적으로 올려도 될까. 이런 엄마라고 말해도 될까. 이런 글을 써도 될 만큼 충분히 생각하고 경험했을까. 촘촘한 거름망에 나의 마음을 거르고 걸렀다. 글을 쓰려고 이미 많은 메모를 남겨두고 한국의 마감 시간 안에 완성하지 못했다. 연재하겠다고 다짐해 놓고 이렇게 약속을 어겨도 될까 하는 고민이 더해졌다.
그러나 이내 생각이 달라졌다. 거름망을 거르든 거르지 않든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담고 싶었다. 글쓰기에 빠져들었던 이유도 그거였으니까. 그리고 한국은 일요일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 토요일이니 괜찮아, 충분해!라고 질척거려 본다. 부족함이 있어도 충분하고, 부족함 없이 넉넉해도 충분하다. 그저 충분할 만큼 충분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