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경이, 류시화
한때 나는 삶에서 슬픔에 의지한 적이 있었다
여름이 가장 힘들고 외로웠던 때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슬픔만이 있었을 뿐
남편의 시낭송을 들으며 따라간다. 외우는 시마다 내 마음 같을 때가 참 많다.
시는 어째서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가. 어떻게 이렇게 위로와 공감이 되는가.
시는 우주이자 신의 또 다른 이름인 걸까.
한때 나도 시인이 꿈일 때가 있었다. 아니다. 영원한 꿈이다.
누군들 시인을 꿈꾸지 않을까. 꿈이라서 희망이다. 간직하는 마음. 아름다운 삶의 방향으로 이끄는 빛.
아름다운 삶이 곧 잘 사는 삶이라는 화두를 소크라테스가 던졌다.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철학사는 잘 사는 것에 대한 철학자들의 저마다의 답변서이다.
시인 류시화는 질경이를 통해 우울에 뒤덮이지 말라고 한다. 그런 삶은 분명 잘 사는 것이 아닌 그냥 사는 것일 테지. 아니 못 사는 것일 테지.
슬픔은
질경이와도 같은 것
아무도 몰래 영토를 넓혀
다른 식물의 감정들까지 건드린다
시인은, 뽑아낼 새도 없이 갑자기 뿌리내리는 슬픔을 경계하라 일러준다.
맞다. 감정의 대가 스피노자도 그랬다. 감정을 선과 면을 다루듯 기하학적 방법으로 증명하겠다면서 <윤리학>을 썼다. 스피노자는 <윤리학>3부에서 감정을 분류한다. 슬픔계열과 기쁨계열에 대해 이야기한다. 슬픔계열의 최고봉이 '우울'이다. 쾌락적 사랑에서 오는 기쁨도 기쁨이 아닌 슬픔이라 한다. 왜냐하면 그 길의 도착지는 우울이니까.
그러니 시는 철학의 응축이다.
가장 아름다운 말. 시어.
가장 아름다운 말. 남편이 외우는 시.
아름다움을 외울 수 있을까? 그래서 암송이 저렇게도 힘이 드는 걸까? 한 달을 두 달을 여섯 달을 해도 끝내 완벽하게 외우지는 못한다. 어딘가 몇 군데 틀린다.
그런데 이 시 <질경이>는 다 외웠다.
대통령 별장이었다던 청남대 시낭송콘서트 무대에서 남편은 낭송했다.
잔잔한 음악에 맞추어.
찍어온 동영상을 언니한테 보여줬다.
"세상에.... 너무 잘한다.... 눈물이 다 난다...."
나도 울었다.
얼마나 기를 쓰고 외웠는지 아니까.
우울이 나를 덮치지 않게.
남편이 날마다 <질경이>를 아침저녁으로 낭송해 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