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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페이지가 될 수 있게

일터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였을까

by 아비치크

"언젠가 오늘 이렇게 일하는 모습이 참 그리울 것 같아요."


오늘도 또 야근인가 하며,

회의실에 모여 배달 온 엽떡이나 뜯고 있던 그때,

하도 본인의 머리를 쥐어 뜯어서 산발이 된

귀엽지만 사나운 우리팀 막내의 한마디다.


빙긋 웃음을 보이며 어떠한 뜻인지 물었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그다지 흔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대학교 공모전 전날 밤

저녁도 거른 채 자리 뒤 화이트보드 하나 붙잡고 몇 시간을 떠들었을 때,

늦게 퇴근하던 옆 팀 부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조별과제 하는 것 같아요. 보기 좋아요.”


생각해보면 가관이었다. 누워서 토론하고, 논리 안 맞으면 “아악!” 소리 지르며 소파로 기어가고, 갑자기 박수치다 좌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서로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님, 이게 맞아요?'라고 끊임 없이 대화하며 서로를 설득하는 사람들. 귀했다.




시끄럽고 서로를 가만 두지 않는 사람들

우리 파트는 30대 셋이서 수백만 명이 쓰는 앱의 메인 화면을 기획한다. 그래서 그런가, 다들 하나를 결정할 때 쉽게 정리되는 법이 없다. 이게 맞나, 저게 더 좋나, 끊임 없는 아이디어가 오고 간다.


말이 끊길 틈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지도 않는다. 그런 서로의 모습을 봐와서일까? 서로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단단한 느낌이었다.


사내에서 재밌기로 소문났지만, 사실 같은 일만 10년 넘게 에이스 라인을 타는 분위기 메이커

“내 새끼는 내가 챙긴다”며 팀원을 위해 빠따 들고 뛸 것 같은 파이터

굉장히 일 안할 것 같지만 요즘 친구 답지 않게 FM이고 하드워커인 막내까지


글을 쓰다보니 참 좋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일 좋아하면 변태라던데...


그래서 그럴까. 매번 야근을 해도 지친 내색보단 행복해 보였다.


매일 야근 야식을 먹으면서도 “오늘은 뭐 먹죠?” 하고 웃는 사람들.

힘들다고 "하 입에서 단내 나요."라고 불평하다가도 토론이 시작되면 제일 많이 떠드는 사람들.

뭐라도 하나 정해지면 피그마와 기획서가 Chat GPT처럼 뽑히는 사람들


쉬자는 의미로 가게 된 강릉 워케이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일 일정을 기획했지만 마지막날까지 막상 바다 한 번 못 본 채 일했다.


그래도 다들 불평 없이 (사실 또 모르지..?) 일하고 있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하던 회의를 멈추고 노트북을 덮어 버렸다. 그리고 팀장님께 한 마디 건냈다.


“두 시간만 저희 찾지 마세요~”


그리고 자유를 얻기까지 고작 100미터, 2차선 차도 건너편.

거친 파도 소리가 키보드 타이핑소리보다 훨씬 컸음에도 듣지 못했던 우리는,

서로의 웃음소리가 사실 회사보단 밖에서 더 또렷하단 당연한 사실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즐겨야만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쳐 있었다.


항상 혼자 일했고, 작지만 이런 파트도 꾸려보지 않았던 나에게 수많은 의사결정과 그 책임, 그리고 가끔씩 일어나는 파트원들의 멘탈 케어는 매번 새롭고 때로는 벅찼다. 턱이 아프게 하루 종일 떠들다가 집에 가는 날의 유일한 낙은 냉기가 살짝 서린 설레는 기온과 서늘하지만 신선한 공기와 함께 마냥 걷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저 당연한 일이지, 견뎌야지 하며 수없이 스스로를 붙잡고 다짐했지만, 막상 나를 이 자리에 존재하게 했던 건 팀원들의 밝은 얼굴들이었다.




누군가의 그리움 속에 나도 살아 숨쉬고 있었다.


나 역시 그리울 오늘,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모르는 상사가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원해도,

우리의 고민이 그저 몇 시간의 허상으로 사라지더라도,

AI가 잘 못 그린 그림처럼 캐릭터들은 항상 웃고 있는 그림 일기가 되길 바란다.


그것만이 넘기고 잊혀지는 페이지가 아닌,

단단하고 찐한 색상의 북마크가 표시될

올해라는 한 챕터를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이 챕터를 조금 더 길게 쓰고 있지 않을까 싶다.


회상 속 2D 캐릭터의 삶이, 꽤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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