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던, 목표보다 소중한 낭만을 찾아서
“사장님, 물 하나, 비빔 하나 주세요.”
못 알아 듣는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혼자 온 사람이 메뉴를 2개나, 그것도 메인 메뉴만 시켰으니까.
사실 평소보다 덜 시켰다. 지난번에 왔을때도 곱배기 하나, 일반 하나를 시켰다.
먹는 욕심이 많지 않은 내가, 이렇게 욕심 내는 유일한 곳.
오랜만에 맞이한 부산 밀면이다
첫 만남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도 가끔 너무 그리운 맛.
오랜만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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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내가 챙겼던 것 같은데, 육수도 있었던 것 같은데,
신기하게 몸이 기억하는 곳을 바라보니, 안내 문구는 사라졌지만 물통은 여전하다.
알려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동해서 챙겨본다.
그 사이 도착한 음식.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고 한 입 한다.
그리고, 알았다.
같은 곳에서 너무 많은 것이 변해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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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부산 여행은 너무나도 즉흥적이었다.
휴가가 너무 많았고, 계획은 미리 하지 않았기에 9일이나 되는 휴가를
무엇을 할까 고민이 많았다.
해외에 나갈까, 집에서 공부나 할까, 그러다.야구를 보니 야구장에 가고 싶었다.
경기 일정을 찾아보니 다음 경기는, ‘창원’이었다.
그렇게 창원을 들르는 코스로 ‘부산’을 택했다.
한때 내가 사랑했던 도시.
일년에 7번을 방문하며 여자친구가 부산에 있다는 소문까지 돌던 곳이었는데,
최근에 너무 뜸했다.
언제 왔었지, 기억이 없네 라는 생각에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한 입 먹고 알았다. 마지막이 4년전의 출장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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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년전 그날, 야구 앱을 담당하던 나는, 자이언츠로의 출장이 잡혔다.
야구를 너무 좋아하는 나로서는 설렘 가득한 출장이었고,
함께 가는 팀원도 마음이 너무 잘 맞는 사람이라 좋았다.
출장이지만 일 같지 않았다.
부산 야구의 상징과 같은 단어, 마!라고 써있는 사직구장의 조형물에 신기해하고
택시 기사님께서 안내해주신 횟집에 감탄하고
KTX에서 이야기 꽃을 나누다가 경고를 받기도 했다.
그땐 그게 뭐라고, 그렇게 하나하나가 행복했을까.
야구, 내가 사랑하는 도시.모든 것들이 그저 감사하고 즐거운 나날이었다.
하지만 몰랐다. 딱 1년 후에, 이 모든 것이 사라질 거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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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야구 팀에는 ‘낭만 투수’라 불리는 남자가 있다.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축복이라 불리는 FA에서
수 억을 더 벌 수 있는 상황에도 어릴 적부터 꿔온 꿈이라며
자신의 낭만이라며 다른 팀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팀의 상황을 고려하며 재계약을 했다.
그는 한번도 우리 팀의 에이스인 적은 없지만, 계약 이후로 오히려 성적이 치솟았고
마치 드라마처럼, 어릴 적부터 팬이었던 그 팀에서 에이스가 되었다.
계약 직전, 아버지를 잃는 슬픔이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던 말.
‘돈보다는 낭만을 쫓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을 따른 그.
그 말처럼 낭만있게 자신의 팀을 지킨 그는,
현재 리그 팀의 에이스이자 대들보, 비타민으로서 자신의 꿈을 계속해서 이뤄나가고 있다.
——
4년만에 다시 부산에 온 나에게,
밀면 한 젓가락이 나에게 알려준 것은 낭만이었다.
취업 준비생이던 때,
훨씬 더 높은 연봉을 제시했던 회사도 거절하고 야구라는 취미에 미쳐
업은 관계도 없음에도 계열사란 이유로 회사를 고른
어쩌면 ’실수이자 낭만‘을 택했던 나는
실제로 야구라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야구라는 업에 과감히 나를 던졌었다.
일을 하면서도 힘들다 느끼지 못한, 하루하루 행복한 나날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사랑했다.
하지만 사회는 낭만을 권장하지 않았고
나의 그라운드를 시멘트로 덧댔으며,
나 역시 그 사이 인생을 배운다는 명목에 돈과 자본주의에 미쳐 버렸는지 모르겠다.
회사의 정치싸움과 이기적인 마음에 지쳤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냉혈한이 되어 있었다.
——
새하얀 윤슬이 평소보다 조금 더 빛났던 광안리의 횟집에서
”뭔가 성공한 것 같아요“, “너무 행복한데요”라며 나눈 일품진로는
지금 숙소에서 혼자 한 잔 기울이는 테이블에도 여전히 놓여 있다.
혼자 2인분을 시켜도 부담 없는 밀면은
여전히 같은 맛이지만 젓가락 하나 하나에 느끼는 감정은 덜해졌는지 모른다.
함께 했던 동료는 더 사랑하는 일을 찾아 떠났다.
내가 사랑했던, 나의 자부심이던 일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나의 부산은 또 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우연히 일정이 겹친 친구는 평소에 잘 오지도 않던 해운대로 나를 불렀고,
새로운 술을 접하게 해주고,
서울에서 하지 못 한 속깊은 각자의 고민을 나눌 수 있게 했다.
우연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부산을 온 것도, 당시 출장을 간 것도, 야구라는 일을 했던 것도, 아니 야구를 처음 본 것도.
하지만 그때의 감정 하나 하나가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회상속에서 헤엄치며 웃고 있는 나를 만들었고,
다시 낭만을 찾아 방랑하는 한때 ‘여행을 위해 살던 나’를 다시 만들었다.
‘왜 살아야 하지?‘라는 막연한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던 최근의 나는
새로운 낭만을 찾아 보려고 한다.
이 공간에서 찾은 나의 낭만이 이루어 질때까지
’낭만 투수‘가 에이스가 되어간 그 과정 같이
잊고 있었던 꿈을 위해 한 걸음 내딛어 보려 한다.
나와 광안리를 함께 했던 그 분이 궁금한
잘 지내냐고 연락을 하고 싶은, 그런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