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견디며 성장하는 어린이
눈 오는 날이었다. 이비인후과는 여전히 붐비고 있었다. 겨우 남은 자리가 있어서 자리를 잡았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학교 근방에 있는 병원이라 혹 아는 얼굴이 있을지 몰라 둘러보았다.
어느덧 내 이름이 불려졌고 코로나 2차 예방 주사를 무사히 맞고 나왔다. 숙제를 하나 해낸 기분으로 가볍게 병원을 나섰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눈발은 굵어져서 영화처럼 시야가 흐려지고 있었다.
막 병원 입구를 벗어나려는데 저만치 청년 둘이 서성이는 게 보였다. 한눈에 봐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으로 보였다. 청년 둘은 검정 롱패딩에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모자 위로 눈이 쌓이고 있었다.
그 청년들과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청년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렴풋한 모습이 시야에 뚜렷하게 잡히는 순간 아,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청년 중 하나는 바로 제자 수호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세상에, 우리 수호구나! 어쩜 이리도 멋지게 컸을까.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나라에서 스르르 나타난 왕자들을 마냥 감탄하며 보고 있었다. 곁에 선 청년은 수호 형이었다. 뻥튀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커버린 제자 수호는 단단하고 푸르른 나무 같았다. 그 어린 티는 어디로 사라지고 이렇게 아름다운 왕자가 되어 나타나다니, 그저 꿈만 같았다. 4학년과 5학년 두 해를 연이어 담임했던 수호는 5년이란 세월을 지나 어엿한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진료실에 있던 수호는 내 이름이 불려지는 순간 나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서둘러 진료실로 들어가는 선생님에게 인사할 겨를이 없었다. 수호는 못 본 척 그냥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진료를 마칠 때까지 수호는 형과 함께 나를 기다려주었다.
수호 말을 듣고 있는데 자꾸 마음이 뭉클하고 눈이 뜨끈해졌다. 쑥스러워 도망갈 수도 있는데, 다음에 또 보겠지 하고 갈 수도 있는데 수호는 나를 기다렸다. 우리는 간단한 안부를 조금 나누고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책 열심히 읽지, 하고 물었다. 수호는 씩씩한 군인처럼 선생님 제자라서 날마다 책 읽습니다, 하고 말했다. 기뻤다.
4학년 때 수호 생각이 난다. 나는 아침시간과 국어시간이면 책을 읽어주곤 했다. 수호는 그 어떤 어린이보다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에 몰입했고 적극 호응하면서 교실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었다. 책 읽는 시간, 연극하는 시간은 수호의 순수하고 때로 과장된 표현으로 즐거움을 더해 갔다. 수호는 선생님에게 기운을 주는 독자였다.
<4학년 365일의 나> 최수호
2018년을 지내면서 나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 앞 줄임) 그중 책 읽고 듣는 것이 제일 많이 발전했다. 책이 점점 두꺼워지고 하루에 읽는 것이 늘어났다. 듣는 시간도 늘어났다. 그럴수록 난 더 발전해 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책 읽는 것이 흥미롭고 환상적이고 끝내 주었다. 처음엔 뭐지? 우리가 유치원생도 아니고! 좀 많이 이상했지만 내가 발전할수록 그 이유를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 중간 줄임)
그리고 선생님이 책을 읽어주시면서 정리하는 법이 몹시 발전했다. 선생님은 시도 알려주셨다. 시는 진실만 쓰는 것이다. 선생님은 시나 이런 것을 하려고 어딜 가는 일이 많다. 선생님은 참 존경받을 한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넓고도 넓은 바다같이 아름다운 시를 알려주셨다.
그래서 진짜로 선생님은 평화로운 것 같다. 하지만 화 내실 때는 전쟁터 같이 무서우시다.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말 안 들을 때 나오는 파워다!
나는 수호가 초등시절은 지났지만 여전히 날마다 책을 읽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선생님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눈 오는 날 병원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수호의 반듯하고 다정한 모습을 보고 그렇게 느꼈다.
길을 가다가 수호 형제를 한번 더 보고 싶어서 뒤돌아 보았다. 놀랍게도 수호와 형은 저만치 뒤에서 천천히 오고 있었다. 길이 같은 방향인데 이미 인사를 하고 난 뒤라 나를 배려에서 뒤에 만큼 오고 있었던 것이다. 둘은 멈추어서 한참이나 손을 흔들었다. 또 언제 볼지 모르는 수호 형제를 보며 나 역시 진심으로 손을 흔들었다.
수호는 4학년일 때 슬픈 일을 겪었다. 어느 날, 그렇게 씩씩하던 수호가 엉엉 울면서 교실로 들어왔다. 모두 깜짝 놀랐다. 수호는 울면서 자기 자리로 가더니 책상에 엎드렸다. 그리고는 계속 울었다. 너무 슬프게 우는 바람에 까닭을 물을 수도 없었다.
토닥이며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우는 까닭을 물었다. 수호는 울먹이면서 아끼던 햄스터가 죽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오늘 햄스터를 묻으러 간다는 말을 겨우 한 뒤 또 울었다. 친구들도 돌아가며 토닥여 주었지만 슬픔이 자못 컸는지 수호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렇게 슬픔을 안고 수호는 하루를 말없이 보냈다.
수호는 시간마다 발표하던 어린이였다. 밝고 씩씩했다.
서호는 항상 밝다. 친구가 어떤 말을 하던 웃는다. 자신에 만족하는 것이 보기 좋다.(남강*)
친구들도 수호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햄스터가 죽은 날 수호의 밝은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어졌다. 다른 사람이 되었다. 슬픈 얼굴로, 멍하니 하루를 보냈다. 모든 생명은 죽는다고, 햄스터는 좋은 곳으로 갔을 거라고 말해주었지만 위로가 되지 못한 듯했다.
점심을 먹고 수호와 나들이를 했다. 수호는 집에 가면 할아버지가 햄스터를 묻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흐려지는 말끝에 진한 슬픔이 묻어났다. 햄스터를 묻어야 하는 현실이, 그래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수호를 계속 슬프게 만드는 듯했다.
그날 오후, 수호 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아침에 일어난 일을 설명드렸다. 수호 어머니는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 종일 말도 안 하고 슬퍼할 줄은 물랐다고 했다.
이튿날이 되었다. 전날보다는 조금 기운을 차린 수호가 시공책을 모아둔 상자에서 제 공책을 꺼내왔다. 시를 쓰기 시작했다. 어제처럼 엎드려 있지 않고, 멍하니 있지도 않고 시를 쓰겠다고 해서 다행스러웠다. 죽은 햄스터에 대한 시를 쓰겠구나 하고 짐작했다.
햄스터의 죽음
최수호
우리 집 햄스터
죽었다.
왜 죽었을까?
햄스터가 죽으니
내 마음도 죽었다.
시를 보고 조금 놀랐다. 가슴이 찌르르 해지는, 강렬한 시였다. 늘 밝던 수호가 그렇게 슬피 운 것도 처음이지만 슬픔을 이렇게 시로 표현한 것 또한 처음이었다. 수호는 다정다감한 어린이였고 동화책의 새로운 세계를 만나면서 책을 깊이 사랑하게 된 어린이였다. 우리 반은 날마다 시를 낭송하기도 했고 종종 나가서 시를 쓰기도 했는데 수호는 그런 시간을 좋아했다.
수호가 쓴 시는 유머가 있으면서 따뜻했다. 수호가 쓴 시 여러 편이 있는대 대부분은 가족이야기였다. 한 번은 교정에 있는 소나무를 보고 시 쓰기를 했는데 수호는 소나무와 곁에 서식하는 생물들을 가족으로 표현했다.
소나무 아파트
최수호
소나무 아파트엔
소나무는 식구가 많다.
솔잎가족
가지 가족
솔방울 가족
껍데기 가족
개미 가족
식구가 참 많다.
근처 공원에 체험학습을 갔을 때다. 둘레 자연을 보며 시 쓰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도 수호는 보는 대상에 가족을 담아 시를 썼다.
가족
최수호
우리 손가락은
엄마, 아빠, 동생,
나 이렇게 다섯인데
플라타너스는
열 명이 넘는 대가족이다.
수호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컸고 부모님과 조부모 역시 수호를 많이 사랑하셨다. 그런 수호에게 햄스터는 당연히 가족이었다. 소나무에 오른 개미도 소나무 아파트 가족의 일원으로 표현했는데 날마다 보듬고 살던 햄스터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식구로 여기는 햄스터가 죽었으니 수호는 그 슬픔을 견디는 일이 몹시 어려웠던 것이다.
수호는 햄스터가 수명이 다해 죽은 걸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가진 듯 했다. 얼마 전까지도 생생히 살아있던 햄스터가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의 마지막에 '내 마음도 죽었다'라고 썼다. 햄스터가 제발 다시 살아왔으면 좋겠다고 하지 않고, 너무 슬프다고 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도 죽었다고 썼다. 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수호는 그 작은 존재를 그만큼 사랑했다.
수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주고 싶었다. 그래서 주말마나 내는 꽃씨 신문 '선생님 이야기' 꼭지에 수호의 햄스터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수호가 쓴 시도 같이 실었다.
...... 수호는 햄스터의 죽음을 보고 '내 마음도 죽었다'라고 했습니다. 큰 슬픔이 느껴집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모든 생명은 한 번 태어나면 죽습니다. 4학년 3반, 우리들의 지금이 소중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줄임) 태풍으로 인해 곳곳에서 재산과 인명피해가 일어났다는 뉴스가 들려옵니다. 그런 소식을 들으며 햄스터로 인해 폭풍 같은 시간을 보냈을 수호를 생각해 봅니다. 햄스터는 떠났습니다. 하지만 즐거웠던 추억은 수호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햄스터와 함께 한 추억은 수호가 성장하는데 소중한 밑거름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울적할 때마다 햄스터와 함께 했던 즐거웠던 일을 떠올리기 바랍니다.
월요일 아침 수호의 시를 읽은 친구들이, 부모님이 답장을 써서 보내왔다.
▪ 수호 햄스터가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 (최찬)
▪ 이번 주에 햄스터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이 실렸네요.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서호가 진우에게 전화를 했어요. 햄스터가 숨을 십 분 째 안 쉬고 있다고 죽은 거 같다고 말해서 우리도 너무 슬프고 걱정이 되었어요. 서호는 얼마나 더 놀라고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까 하며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생각했어요. 햄스터에 대한 수호의 큰 사랑이 느껴집니다. 우리 수호 힘내세요! (전진우 어머니)
해마다 어린이들에게 그림책 <세상의 많고 많은 파랑>을 읽어주곤 한다. 수호를 담임할 때는 이 책을 알지 못해서 읽어 주지 못했다. 이 그림책에는 수호를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이 죽음을 앞둔 늙은 개를 다정히, 진심을 다해 안고 있는 장면이다. 깊은 사랑과 슬픔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수호도 수호의 햄스터를 그렇게 안고 슬퍼했을 것이다. 언젠가 수호를 만날 수 있다면 이 그림책을 꼭 읽어주고 싶다.
그림책 속 주인공의 개는 죽었고 주인공 역시 수호처럼 슬픔의 시간을 보낸다. 그림책은 이때의 슬픔을 '아슴아슴 슬픈 파랑'으로 표현하고 있다. 살아있는 존재는 누구든지 이별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슬픔의 시간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시간을 잘 보낸다면 더 성숙해질 것이다. 지나간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다가오는 시간을 새롭게 받아들인다면 슬픔은 인생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시가 되고 동화가 되고 또한 그 무엇이 될 것이다.
슬픈 시간을 충분히 보낸 주인공은 어느덧 청년이 되었고 여자 친구를 만난다. 마지막 장면은 여자 친구와 새로운 강아지와 바닷가를 거닐며 새록새록 새로운 파랑을 꿈꾸는 것으로 맺는다.
지금 수호는 어떤 파랑을 지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아직 고등학생이나 공부하느라 꼬박꼬박 졸린 파랑을 지나고 있거나, 공부하느라 애쓰는 파랑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진로를 고민하느라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 터널을 잘 통과할 것이고 새로운 시기를 맞이할 것이다. 새로운 파랑을 만날 것이다.
시와 책을 사랑하게 된 수호, 수년이 지난 뒤에도 선생님을 기다려준 수호는 분명 멋진 서사를 만들며 자신만의 인생지도를 그려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