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한쪽도 나누고 시도 나누고
중요한 예식을 앞둔 사람처럼 며칠 전부터 공책에 시를 곱게 필사해 놓고 수요일 아침을 기다린다.
필사 한 시는 오규원 시인의 '산'이다. 시는 신선한 5월의 연둣빛과 어울린다. 시를 공책에 옮겨 적으며 중얼중얼 읽는다. 외우고 싶은 시다. 겨우 일곱 줄인데 산에 대한 추억을, 그리움을 넉넉히 담았다.
첫 행이 '산에서 시를 쓰면'이다. 무릎을 친다. 너무나 쉬워서 아무도 찾지 않던 문장을, 이토록 쉬운 문장을 찾아낸 시인이 얄밉기까지 하다.
시인은 산에서 쓴 시에서는 산냄새가 난다고 했는데 뒤이어 냄새의 주인공들이 줄줄이 나온다. 소나무, 오리나무, 꿩, 산비둘기, 떡갈나무......
마음이 들떠 나의 산 냄새 주인공들도 보태어 본다. 지난날 오르던 산에서 만난 생강나무와 딱따구리, 산딸기, 고라니와 다람쥐와 딱정벌레, 각시붓꽃, 할미꽃들의 이름을 써 본다.
산 냄새를 풍기는 이름을 적고 보니 정말 시에 적힌 말과 말 사이에서 산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이제 정성껏 시를 필사한다.
감상도 쓰고 그림도 그려본다. 필사 노트를 사진으로 찍은 뒤 카톡으로 들어가 시 배달 할 지인 이름을 찾아 전송한다. 시와 시 속에 담긴 냄새, 내 기억 속 산 냄새까지 얹어 전송한다
이제 답장을 기다린다. 시요일 시 선물을 받은 이들의 눈빛, 웃음을 상상한다. 저마다 얼굴을 씻다가, 가스불을 켜다가, 일어나 눈을 막 비비다가 시를 받았을 것이다. 아, 좋구나 하며 바로 답장을 적는 이도 있을 것이고 바빠서 이따 읽고 답장 써야지 하며 오후까지 까맣게 잊는 이도 있을 것이다.
톡톡, 답장이 도착한다. 어느새 빨간 꽃이 핀 듯, 이름 옆에 빨강 숫자 1들이 보인다. 두근두근 답장을 열어본다. 내가 맡은 시 냄새와 달리 시를 받은 이들은 시에서 어떤 냄새를 맡았을지 몹시 궁금하다.
시를 받은 한 분은 그새 칠판에 시를 적고는 어린이들과 시 감상할 준비를 했다. `산`이라는 시가 교실로 들어가더니 칠판에 자리 잡았다. 보낸 시가 교실까지 이어졌다.
아가를 키우고 있는 지인에게 톡이 왔다.
지난해 아기를 낳은 지인은 휴직 중이다. 처녀시절과 달리 지인의 일상 반경은 아주 좁아졌을 것이다. 아가와 함께 움직이고 먹고 잠자는 시간과 시간이 이어질 것이다. 그림책과 시를 좋아하는 지인은 바쁜 틈에도 시요일에 시를 받으면 꼬박 답장을 쓴다. '산'이라는 시를 받은 지인은 곧 아가랑 산책을 나갈 것이다. 아가와 풀냄새, 나무냄새를 맡으면 좋아할 지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톡, 원주에 사는 지인에게 답이 왔다.
저마다 산 냄새를 갈망한다. 봄은 가는데 하루하루 무언가에 쫓기어 나들이 한번 못한다. 산 냄새 맡고 싶어요, 에서 그 마음을 알 거 같다. 하지만 시 배달이 오자 '산'이라는 시를 읽자 할 일의 우선순위가 흔들린다. 해야 할 일은 뒤로 가고 하고 싶은 일이 앞에 올 것이다. 지인은 곧 어린이들을 이끌고 나갈 것이다. 시가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몸이 많이 아파 치료 중인 지인이 답장을 했다. 톡을 열기 전부터 마음이 아릿해온다. 긴 문장들...... 기운 없을 텐데 아픈 지인은 긴 문장을 썼다. 이 문장은 선생님이 쓰신 거죠? 하는 묻는 순간 나는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둘 다 처녀였던 시절 함께 맡았던 냄새와 웃음, 눈물 같은 것들이 불쑥 떠올랐다.
지인이 어서 건강해져서 산으로 들로 다니며 흙냄새, 풀 냄새를 실컷 맡기를 기도한다. 우리 집에 꼭 와서 갓 구운 빵 냄새도, 오래도록 써온 내 일기장 냄새도 맡아주기 바란다.
시요일을 시작할 때는 핑계 삼아 나도 시 좀 읽어보자는 마음이 있었다. 덕분에 시집을 꽤나 들여다봤다. 생각보다 수요일인 시요일은 빠르게 다가왔다. 여유롭게 시를 준비한 날도 있지만 수요일 아침이 되어서야 아차, 하는 날도 많았던 것이다. 혼비백산해서 시를 고르고 배달한 날도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든 시를 배달하고 나면 뜻밖의 사연이, 시가 아니었으면 받을 수 없었을 소식이 날아오기도 했다.
'시요일이 있으니 삶의 쉼터가 하나 생겼어요. 잠시 쉼터에서 시 한 편 읽고 가요. 저도 괴산숲에 살아요!'
괴산, 괴산숲에 사는 지인이 톡을 보내왔다. 지인은 시에 대한 짧은 단상에 이어 시 같은 소식을 전해왔다.
놀라운 소식이다. 양배추 먹는 애벌레를 잡아 그물망에서 밥 주며 키운다고 했다. 벌써 하얀 나비가 훨훨 날아가는 장면이 눈에 어른거린다.
저마다 가슴 한편에 시를 품고 산다는데 시요일을 하다 보니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정글 같은 날들을 보내느라 잠시 잊었는데 시를 읽으면서 품은 시가 풀려나오는 것이다. 겨우 한 구절짜리 미완의 시지만 그렇게 한 구절, 한 문장이 모여 어느 날 시가 완성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실은 나도 그렇다. 분명 내 몸 어딘가에 시가 숨어있는 거 같은데 좀처럼 시의 말로 뱉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시를 읽고 필사를 하며 시를 기다리고 있다. 강아지와 고양이, 물가에서 만나는 오리와 왜가리에게 말을 건네며, 말라 스러진 철쭉꽃에게 말을 걸며 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인에게 시를 선물하며 뜻밖에 다가오는 시어를 모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시가 점점 좋아진다. 계속 시 옆에 있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