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4학년 어린이와 시 공부
정년 퇴임 후 7개월 만에 어린이 앞에 섰다. 4학년 어린이들과 두 시간짜리 시 수업을 하게 된 것이다. 수업을 부탁받은 뒤 내내 머릿속으로 어떻게 수업을 할지 그림을 그려보았다. 그러면서 그간 수업에 쓰려고 만들어놓은 시 자료를 뒤적였다. 2001년도에 만든 파일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그 파일을 열어보았다.
인천에서 3학년 어린이들과 수업했던 지도안이다.
시 낭송이나 감상방법이 낯설던 때였다.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내고 싶어 몸살을 앓던 젊은 날이었다. 틈만 나면 동시집이나 어린이 시집, 시 교육 관련 도서를 읽으며 자료를 모았다. 무던히도 연구하고 고민하고 시도했다. 그러면서 시 낭송이 얼마나 예술적인 활동인지 깨달았다. 몸짓과 가락 악기, 타악기와, 구음이 시낭송과 얼마나 멋지게 연결될 수 있는지 또한 알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시 자료는 곳곳에 흩어져 잠자고 있었다. 쌓여가는 폴더와 파일 속에서 필요한 시 자료를 찾기는 모래알에서 금가루 찾는 격이었다. 때로는 새로 만드는 게 나았다. 늘 만들기만 했지 분류하고 갈무리는 잘 못했다. 이제 느긋하게 꼭꼭 숨은 다락 속 오랜 자료를 살펴본다. 늘 이런 게 문제인데 애초 계획했던 수업 준비는 어디로 가고 오래전 어린이가 쓴 시, 그 어린이와 했던 수업을 떠올리며 상념에 빠져들고 있었다.
정신 차리고 시 수업 프레젠테이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잘 아는 후배교사는 유료 AI프리젠이션으로 멋진 발표자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방법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아직은 내 손으로 만들어본다.
- 남자 어린이가 많아요. 좋게 말하면 에너지 넘치고 다르게 말하면 다루기 힘들어요.....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 건네는 말인 줄 안다. 약간 긴장이 되었다. 선생님 말이 무슨 뜻인지 오랜 경험으로 짐작할 수 있어서였다. 남자 어린이가 많아서 조금 어려웠던 한 해가 떠오른다. 남자 어린이들 수다는 여자 어린이를 수시로 넘어섰다. 그 파고는 굉장했다. 목소리는 우렁찼고 말의 분량도 길었다. 몇몇은 핑퐁게임을 하듯 틈만 있으면 수업 흐름을 끊고 수업 내용을 농담으로 끌어갔다. 난 눈을 부리부리 뜨고 방어하느라 진땀을 빼곤 했다. 그런 어린이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거였다.
시 수업의 목표를 생각했다. 일단은 시를 가르치러 온 머리 희끗한 선생이 어떤 사람인 줄 알려야 한다. 시를 가르치는 사람이 어떤 일상을 보내는지 모르고 시만 배워서는 곤란할 거 같았다. 시수첩을 만들어서 기록하는 일도 놓치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 시가 즐겁다는 생각이 들게끔 해야 한다. 이런 것도 시구나, 하는 마음을 갖도록 쉽고 재미있는 시를 여러 편 보여주기로 했다. 시 고르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가장 중요한 게 있다. 시를 만나기 위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은 낱말이나 문장을 잘 쓰는 기술이 아니라 좋은 마음을 갖는 것.
- 우리 시 공부하기 전에 수첩을 만들자. 시도 쓰고 배운 것도 쓰는 거지......
A4종이를 접은 뒤 가위를 쓰지 않고 손으로 종이를 자르게 했다. 어린이들은 잘 못 될까 봐 걱정하며 자꾸 물었다. 실수해도 괜찮다고 했다. 자른 종이는 가운데 딱풀을 써서 수첩모양을 만들었다. 제목도 지었다.
수첩을 만든 뒤 퇴직 후 나의 일상을 들려주었다.
- 얘들아, 난 40년 동안 교실에 살면서 어린이들을 가르쳤단다. 퇴임하고 나니까 갑자기 학교를 안 가게 된 거야. 40년 동안 다니던 학교를. 기분이 어떨까......
- 이상할 거 같아요. 심심하구......
- 그래서 뭐 하고 지낼까?
- 먹구 자구 싸고 그래요.
- 그렇지. 아주 중요한 얘기를 했어. 이젠 급할 게 없으니까 잠도 충분히 자고 먹을 것도 정성껏 만들어 먹어. 또 뭐 할까
- 시 써요!
- 오, 잘 맞췄어요! 시도 쓰고 어린이들 가르치면서 수십 년 동안 모아 놓은 책도 읽고 그래요.
프레젠테이션을 보여주었다
-와, 책이 그렇게 많아요!
-맨발 안 아퍼요?
화면을 본 어린이들은 궁금증을 참지 못한다.
- 난 날마다 개천 따라 걸어서 마트에 간단다. 그러다 보면 금계국 같은 꽃도 보고, 그래 이 노란 꽃이 금계국이야. 수첩에 이름을 써보자.
금계국에 이어 남생이 구해준 이야기, 개천가 작은 돌 위에서 햇볕 쬐는 자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린이들은 수첩에 남생이, 자라 같은 이름을 썼다.
- 선생님은 자라를 보면 자라야, 자야라 불러. 그러다 보니까 잘 때도 자라 생각이 나는 거야. 자라가 얼마나 사는지 아니?
- 100년이요!
- 오, 잘 아는구나. 근데 그 물속, 진흙 속, 바위에서 그렇게 100년이나 지내는 기분이 어떤지 궁금해졌어. 그런 생각하다 보니 시가 나왔어. 선생님이 쓴 시 한번 들어봐요.
자라야!
강승숙
자라야, 자라야
밤이면
나는 이불속
너는 진흙 쏙
- 시 괜찮니? 별 다섯 개로 평점을 준다면?
어린이들 여럿이 손을 든다. 조금 긴장이 되었다. 내 시가 어린이들에게 평가받는 순간이다.
-별 4개 반 줄래요. 속, 쏙 이렇게 라임이 맞아 좋아요.
-저는 별 5개요. 뭔가 잘 어울려요.
별 3개를 준 어린이도 있지만 어린이들 평가는 대체로 후했다. 기운이 났다. 무엇보다 어린이들과 교감이 된 듯했다. 질문을 했다. 내가 어떻게 자라에 대한 시를 쓸 수 있었을까 물었다.
- 관찰했어요!
- 이름을 불렀어요!
어린이들이 시가 어떻게 오는지 이해해서 기뻤다. 시가 어떻게 오는지 사진을 보여주며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페츄니아를 보여주었다. 어린이들 학교 부근에 있는 시장 초입에서 주운 거라고 했다. 학교와 가까운 곳에 있는 시장이라 어린이 호기심이 커진 듯했다.
- 혼자 떨어진 게 안타깝고 너무 고와서 주웠어. 그리고 시들기 전에 얼른 그려봤어.
- 예뻐요!
- 잘 그렸어요!
다음 사진을 두고 이야기했다. 사진 속 어린이는 이제 중학생이 된 제자로 6학년이 된 어느 봄날, 갓 떨어진 목련 꽃잎과 아린을 주워서는 나를 찾아왔다.
- 얘들아, 제자는 나에게 무얼 준 걸까?
- 시요!
놀라웠다. 시라는 답을 하다니! 나는 이제 고만 가르치고 집에 가도 되겠다고 했다. 어린이들은 뭔가 뿌듯한 얼굴을 했다. 처음에 어수선하고 나보다 더 말을 많이 하려던 어린이들은 차츰 차분해지면서 시에 젖어들었다. 이때 어린이들에게 낭만적이면서도 감성 가득한 시 두 편을 보여주었다.
- 여러분 시 감상 능력이 대단한 거 같아요. 이번엔 시 두 편을 보여줄 테니 부모님께 선물하고 싶은 시를 골라보세요.
왼 편은 내가 가르친 3학년 제자 어린이 시이고 오른쪽 시는 박성우 시인의 시다. 둘 다 좋아하는 시다. 어린이들은 고른 시 제목을 시 수첩에 쓰고 고른 까닭도 썼다.
어린이들은 별, 무당벌레 부부 모두 비슷하게 좋아했다.
- 부모님이 무당벌레 부부처럼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어요.
- 식구들이랑 별 본 지 오래되어서 별 보러 가면 좋겠어요.
말하지 않아도 어린이들 사정이, 마음이 느껴졌다. 두 편 시를 감상하고 소감을 나누면서 묘한 연민의 분위기가 교실에 흐르는 듯했다.
드디어 고르고 고른 시를 소개하며 낭송을 시작했다.
쑥
곽해룡
너도 쑥
나도 쑥
(줄임)
토마토
유강희
앞에서 먹어도 토마토
(줄임)
순식간에 시를 외웠다. 어린이들은 두 편 모두 좋아했다.
- 선생님, 이 시를 외우니까 몸도 마음도 쑥쑥 자라는 기분이 들어요!
- 토마토, 정말 웃겨요!
4학년은 5학년 하고는 달랐다. 꾸밈없이 잘 표현했다. 사랑스러웠다.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드디어 비장의 카드라 할 수 있는 시를 보여주었다. 시를 보여주자마자 탄성이 터져 나온다. 부러움 가득한 목소리였다.
코알라 시간표
박성우
1교시:잠자기
2교시:잠자기
3교시:잠자기
(줄임)
- 와, 좋겠다. 잠만 잔대!
이때 담임 선생님이 손을 번쩍 들었다. 시 발표를 하고 싶다고 했다. 안 그래도 시 바꾸어 쓰기를 하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벌써 눈치를 챈 것이다.
우리 반 시간표
1교시 놀기
2교시 놀기
......
놀기로 시작해서 놀기로 끝나는 시였다. 어린이들은 자신들 이야기를 시로 담은 선생님에게 큰 박수를 쳤다. 이어 시 바꾸어 쓰는 시간을 가졌다. 좋아하는 동물이나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 나 자신, 엄마나 동생도 코알라 시간표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어린이들은 뚝딱 시를 썼다. 사라진 공룡부터 해서 식구들, 기르는 고양이가 고루 시에 등장했다.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고양되었는지 남자 어린이 하나가 손을 번쩍 든다.
- 시 얼른 쓰고 싶어요!
반대하는 어린이들은 없었다. 흐름을 탄 듯하다. 시를 써야 할 거 같다. 시계를 보니 15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알려주고 싶은 시가 더 있지만 참아야 한다.
- 그래요! 시 쓰기로 해요. 지금 창 밖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비 오는 풍경을 써도 좋고 그냥 쓰고 싶은 게 있으면 써도 좋아요. 생각이 안 나고 어려우면 우리가 배운 시를 바꾸어 써도 괜찮아요.
4분을 주기로 했다. 어린이들은 모두 시 쓰기에 열중했다.
- 어, 벌써 시간이 다 갔어요 우리 몇 명만 나와서 발표할까요.
다섯 어린이가 나와서 발표했다. 하나하나 좋았다. 친구들은 시 낭송을 마칠 때마다 크게 박수를 쳐주었다. 담임 선생님은 뒤에서 나는 앞에서 어린이들이 발표할 때마다 눈이 점점 커지고 입이 점점 벌어졌다. 끝없이 감탄하고 있었다. 더 발표하고 싶다는 어린이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부족했다.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수업 소감을 나누기로 했다. 시를 즐겁게 경험한 어린이들은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남자 어린이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 선생님이 저의 시감각을 일깨워주셨어요. 고맙습니다!
뭉클했다. 이 짧은 시간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어린이들이 마음을 열고 시와 잘 놀아 준 것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시 수업을 마치고 현관을 나서는데 여전히 비가 왔다. 교정에 핀 꽃도 비 오는 풍경도 다 아름다웠다. 맨발로 걸었다. 행복한 사람이 되어서 걸었다. 오후에 담임 선생님에게서 카톡이 왔다.
시 수업이 잘 끝난 데에는 담임교사의 힘도 컸다. 담임 선생님은 어린이와 함께 시를 낭송하고 쓰고 발표하면서 교실을 한 덩어리로 만들었다. 예술적인 감각이 풍부한 담임이 그간 어린이들과 해 온 노고가 느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행복했던 시 수업을 생각하며 이제 오래된 시 자료를 정리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또 시 자료가 지하 창고에서 잠자고 있지 않도록 이번에는 꼭 정리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