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추석을 기록하다

어린이들이 맞는 추석, 오래도록 이어갈 것에 대하여

by 강승숙

추석 연휴는 길다. 일주일까지 길어지기도 한다. 즐겁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한 긴 시간을 앞두고 어린이들과 추석 때 쓸 책자를 만든다. 추석 이야기를 담을 공책이다. 여기에는 달구경, 송편 만들기, 어른 일손 돕기, 제사 지낸 이야기, 성묘 다녀온 이야기, 어른들의 옛날 추석이야기 듣기 같은 내용의 목차가 들어간다.


- 추석이요, 아무 데도 안 가는데요. 송편도 안 해요.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명절인데도 평일처럼 지내는 가정의 어린이가 있다. 이런 예는 드물지만 예전의 추석 풍경이 희미해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이제 어린이들에게 추석은 사촌들에게 용돈을 많이 받거나 게임하는 시간이 늘어난 휴일일지도 모른다. 제사를 지내는 가정조차도 전이나 나물을 사는 시절이니 그렇지 않은 가정은 더 간소한 명절일 수밖에 없다.


나의 유년 시절 추석을 돌아본다. 새 옷을 얻어 입는 일이 드물던 때라 추석빔을 손꼽아 기다렸다. 동네는 색색의 한복으로 울긋불긋했다. 여자 어린이들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갓 결혼한 부부가 한복을 입고는 커다란 가방과 보자기에 싼 물건을 들고는 고개를 넘어오기도 했다. 추석은 옷차림부터 흥이 났다.


오빠들과 송편 찔 때 쓸 솔잎을 따오기도 하고 식구들과 어울려 송편을 만들기도 했다. 먼저 새벽에 어머니와 방앗간에 불린 쌀을 빻으러 갔다. 일찍 출발해도 방앗간에 가면 사람들이 많았고 물에 불린 쌀을 담은 함지박이 줄지어 있었다. 우리 차례가 오면 가까이서 쌀 빻는 장면을 구경하게 되는데 그게 참 재미있었다.

방앗간 아저씨가 쌀에 소금을 휘 뿌리고 번쩍 함지박을 들어 넓은 통에 쌀을 넣으면 덜덜덜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굵게 빻은 쌀가루가 나왔다. 눈가루 같았다. 다시 한번 큰 통에 부으면 두 번째에는 더 고운 가루가 나온다. 그걸 받아와 반죽을 해서 저녁 먹고 식구들이랑 송편을 빚는다. 어머니는 고르고 예쁘게 빚는데 내가 빚은 건 크기도 제멋대로고 모양도 곱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순간부터 송편을 만들지 않게 되었고 떡집에서 사 온 송편도 거의 먹지 않게 되었다. 추석 때나 먹던 음식을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어서 그 무엇도 특별하지 않게 되었다.


추석책을 만들면서 잊혀가는 추석을 어린이들과 기념해보고 싶었다. 어린이들은 추석날의 기록을 통해 조금이라도 추석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고 교사인 나는 요즘 어린이들이 경험하는 추석 풍경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책자 이름은 '나의 추석이야기'다. 숙제라고 하면 명절을 앞두고 김 빠진다고 볼맨소리를 할 거 같아 추석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했다.


추석을 보낸 뒤 어린이들이 추석책에 쓴 이야기다.


<달님에게 소원 빌기>

▪밤에 달이 나타나자 바로 소원을 빌었다. 소원을 빌 때 아주 많은 소원을 빌었다. 나는 욕심이 많은가 보다.(김서*)

▪벌써 보름달이 떴다. 이모와 같이 소원을 빌었다. 이모가 우리에게 이모부 장사 대박 나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라고 했다. 나는 ‘이모부 장사 잘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 가족 건강하고 행복하게 도와주셔요.’ 하고 소원을 빌었다. 꼭 이루어지면 좋겠다. (최은*)


<일손 돕기>

▪송편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밤을 좋아해서 밤 송편을 많이 만들고 아쉬워서 팥 송편을 조금 만들었습니다. 손자국을 남기니 진짜 송편 같았습니다. (원소*)

▪새벽에 알람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깼다. 엄마가 더 자라고 해서 더 잤다. 엄마랑 큰 엄마가 부엌일을 하고 있는 소리가 났다. 한참 꿀잠을 자고 있는데 엄마가 날 진짜 깨웠다. 다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빠가 제기 닦는 것을 도와 드리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지방을 쓰고 계시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오늘 관찰해 보니 신기했다. 밥상을 차리고 치우는 엄마를 보니까 힘들어 보여서 나중에 집에 갈 때 엄마 어깨를 주물로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백은*)


소원을 빈 어린이, 송편을 만든 어린이, 아빠가 제기 닦는 걸 돕는 어린이들 모습이 정겹게 그려진다.

시를 쓴 어린이도 있다.


<보름달> 정원*

어두운 하늘

아래

어두운 구름 속

보름달

어두운데

밝은 달

참 예쁘다.


<100년 만에 뜬 달> 김민*

분명히 달이 뜬다고 했는데

구름이 가렸다.

저 구름을 어쩌면 좋을까!


<할머니 송편> 이효*

할머니 손주름이

담겨있는 따뜻한 송편

맛도 가지각색인 할머니의 송편


보름달 구경과 송편 만든 이야기를 줄 글로 쓴 어린이도 있지만 이렇게 시로 쓴 어린이도 있다. 원우는 운동을 잘하는 씩씩한 어린이다. 시가 차분하고 서정적이다. 민아의 시 제목은 유머스럽다. 달을 기다리는 마음을 100년이라는 숫자에 담아 표현했다. 간절한 마음을 재치 있게 표현했다. 효정이의 시는 따뜻하다.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깊다. 송편에 손주름이 담겨있다고 썼는데 송편을 만들 때 할머니 손을 잘 본 듯하다.


추석날 조부모님께 예전 이야기를 듣고 적는 것은 소중한 기록이다. 진기 어린이는 친할아버지와 인터뷰 형식으로 이야기를 나눈 뒤 적었다.


▪친할아버지 인터뷰

-진기 : 초등학교 때 어떠셨어요?

-할아버지 : 초등학교 딱 2개월 밖에 못 다녔어, 그 후로 6.25 전쟁 터져서 원.....

-진기 : 그럼 중학교 때는 어떠셨어요?

-할아버지 : 잘 수업받지도 못했지. 덧셈, 뺄셈도 모르는 상태로 중학교 들어갔는데 분수가 나왔어. 그런데 덧셈 뺄셈도 모르는데 분수를 어떻게 해!


더 듣고 싶은 이야기다. 짧아서 아쉽다. 하지만 몇 마디 안에 진기 할아버지가 보낸 시절이, 그 어려움이 여실히 느껴진다. 어린이들이 쓴 추석 이야기는 꽃씨 주말 신문 26호에 실렸다. 글을 본 부모님은 이런 답글을 써 주셨다.


추석 명절 때 꽃씨 반 친구들이 할머니, 할아버지께 어린 시절 옛이야기를 여쭤보고 듣는 모습이 정겨워 보입니다. 진우는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모두 안 계셔서 그리움이 남습니다. 진우와 저는 3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너무 많이 보고 싶어 하고 또 많이 생각나서 지난 옛 추억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고 자꾸 생각이 납니다. (전진* 어머니)


추석이야기는 억지로 쓰게 하지 않는다. 의미를 잘 설명하며 권장한다. 기록을 해 온 어린이들의 추석이야기는 다음 신문에 실어서 함께 읽고 나눈다. 2024년 나의 추석 이야기는 여덟 명이 해 왔다. 두세 명은 깜빡 집에 두고 왔다고 한다. 50% 이상 해왔으니 기대 이상이다. 그 가운데 돋보이는 책자가 있었다. 강도연 어린이 기록물이다. 도연이는 이면지를 이용한 아코디언 추석책을 길게 만들었다. 첫 장을 열었다. 할아버지 장례 이야기가 나온다. 다큐멘터리처럼 장례식장에서 보낸 시간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친할아버지 장례이야기

강도*

<1일 차>

오전 5시, 나와 동생은 오전 1시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외할머니 말씀을 듣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너무 졸려 비몽사몽 2층을 지나 3층으로 갔는데 언니와 오빠 가족들은 벌써 와 있었다. 오른쪽으로 가니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이 있었다. 그걸 보고 너무나 울고 싶었지만 참았다. 왜 그랬는지는 생각이 나지는 않았다.

우리 가족들은 할아버지 처음으로 절을 했다. 우리의 미션은 향 피운 걸 지키는 것이다. 나는 방에서 쉬고 있을 때 구석으로 가서 울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다 살아 계셨는데 처음으로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셔 서다.

(부분 줄임)

구경을 마치고 다시 왔을 때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로 큰언니 울음소리였다. 그걸 들으니 참았던 울음이 나왔다. 가족들이 눈물 닦는 모습이 보였다. 눈물을 멈춘 큰 언니와 작은 언니, 오빠 동생과 함께 어른들 손님맞이를 도왔다. 그러다 보니 잘 시간이 되었다.


<2일 차>

2일 차는 1일 차 하고 달랐다. 언니들, 오빠 동생과 함께 더 많이 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어른들을 조금씩 도와드리고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너무나 기다리는 게 힘들었다. 큰고모가 우리 아이스크림 사러 갈래? 하셨다. 매우 반가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큰고모 차를 타고 근처에 있는 마트에 갔다. 구경할 것도 많았다. 떡볶이 냄새 등 맛있는 냄새들 지나 아이스크림 쪽으로 가서 맛있는 누가바를 사고 돌아와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오전 9시, 어른들이 할아버지 입관식을 보러 가셨다. 나는 오랫동안 할아버지를 못 봐서 어떤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관리자분이 어린이가 입관식을 보면 충격을 받을 수 있어서 안 된다고 하셨다. 조금은 아쉬웠다. 그 사이 어른들이 내려가셨다. 1시간 30분 뒤 어른들이 다들 울면서 오셨다.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한복 입은 할아버지를 관에 모셨다고 했다. 모습을 물으니 관에 잘 들어있는 모습이라고 했다. 다시 우리 가족은 각자 할 일을 하고 할아버지 영정 사진 곁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부분 줄임)


<3일 차>

나는 거의 자는 상태로 일어났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잤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안식원으로 갔다. 사람이 많아 기다림 끝에 어느 방으로 갔다. 할아버지 관이 어두컴컴한 곳으로 들어갔다. 화장을 했다. 우리 가족은 목놓아 펑펑 울었다. 나는 그 순간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억으로 남았다. 마음이 아프다. 그다음 추모공원으로 갔다. 거기에다 할아버지를 묻어드렸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할아버지가 자는 거라고 생각했다.

(줄임)


도연이는 장례식에서 겪은 슬픈 마음과 모인 친척, 손님, 그리고 직접 보지 못하고 어른에게 들은 할아버지 입관식 등에 대해 날짜별로 시간대 별로 자세히 기록했다. 글을 읽다 보면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위해 손주들이 어울려 편지 쓰는 장면이 있다. 뭉클하고 아름답다. 어린이가 장례를 치르면서 이렇게 자세히 쓴 기록은 처음 본다. 소중한 기록이다. 주말 신문을 통해 도연이 글을 읽은 부모님 한 분은 어린 나이에 이렇게 담담하면서 자세히 쓰기 어려웠을 텐데 대단하고 의젓하다고 했다.


추석날, 거리를 걷다 보면 어디를 봐도 추석 분위기를 찾기 어렵다. 문득 여기저기 추석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색동 깃발을 걸어놓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울긋불긋한 옷차림은 없지만 깃발이라도 걸어놓으면 추석은 더 밝고 화사할 듯도 하다.


내가 만난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면 어떤 추석을 보내게 될까.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아야 할 것도 있다. 내가 만난 어린이들이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도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가꾸어서 계속 따뜻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추석도 새롭고 따뜻한 방식으로 이어가면 좋겠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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