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이 만들어주는 도시락

판타지, 치유의 힘

by 강승숙

동화 여러 권을 칠판 앞에 늘어놓고는 어린이들에게 골라 보라고 했다. 어린이들은 주저 않고 <공룡 도시락>을 골랐다.


공룡이라는 낱말이 들어갔으니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다. 이미 사라진, 너무나 거대한, 무시무시한 공룡이라는 낱말은 어린이들의 구미를 당길만하다. 여기에 도시락이라는 정겨운 낱말이 붙어 있다. 급식이나 점심, 김밥, 현장 학습을 떠오르게 하는 설레는 낱말, 도시락이라는 낱말까지 있으니 동화는 어린이들의 선택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공룡들 도시락을 싸면서 무슨 일이 일어날 거 같아요.



표지만 보고도 기분이 좋아지는 <공룡 도시락> 은 68쪽의 얇은 동화다. 책 뒤표지에는 '독서레벨 1', '저학년 이상 권장'이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좋은 동화에 독자 나이가 따로 있을 리 없다. 나이 든 선생도 좋아하는 동화이니 4, 5학년 어린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활자도 큰 글자 책처럼 크고 줄간도 넉넉하다. 뚝딱 읽어줄 수 있는 책이다. 아직 만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책에 흥미를 못 느끼는 어린이들도 솔깃할 동화, <공룡 도시락>을 어린이들에게 읽어주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소녀 다이나는 모든 게 귀찮고 싫다. '지겹다, 지겨워!'를 입에 달고 산다.


부정적인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다이나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엄마가 없는 다이나의 아침은 언제나 콘플레이크에 우유다. 다이나는 그 맛이 지겹다. 사는 게 힘들고 복잡한지 다이나 아버지는 도시락 싸주는 것도 때때로 잊는다. 여기에 다이나가 저지르는 실수에 너그럽지 않다.


어린이들 중에는 싫어요, 못해요, 어려워요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어린이가 있다. 이런 말들은 바이러스처럼 퍼진다. 수학 시간만 되면 그런 어린이들은 '아, 또 수학이야!' 하며 운을 뗀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말을 받아 '맞아, 수학 싫어!'하고 말한다. 순식간에 교실분위기는 어둑해진다. 이를 해결할 방법을 하나 찾았다.


- 자, 수학시간입니다. 구호를 외치겠습니다. 시작!

-수학아, 사랑해! 놀자!


수학부장을 뽑고 수학시간마다 이렇게 해 보았다. 조금 달라졌다. 다이나 아버지도 우리 반 어린이들이 수학구호를 외쳤듯 다이나에게 기운 주는 말을 해줬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다이나는 다정한 돌봄이 부족한 데서 오는,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정서적 불안감이 있는 듯했다. 다이나는 기분이 안 좋으면 엄지 손가락을 쭉쭉 빨아댔다.



언뜻 보면 다이나는 별 장점이 없어 보였다. 장점은 분명 있을 것이다. 다만 단점에 가려있는 것이다. 다이나의 장점을 누가 돋보이게 해 줄 것인가. 아직은 없었다. 다이나는 손가락 빠는 일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또한 물을 마구 튀기며 손을 씻는 조심성 없는 행동들로 인해 친구들과 조금씩 거리가 생겼다.


다행히 다이나는 쉽게 기죽지 않았다. 친했던 친구가 다이나를 두고 다른 친구와 어울리면 '그러든지 말든지 ' 하며 씩씩하게 다녔다. 다이나의 남다른 면모는 박물관 공룡 전시장에서 드러났다. 거대한 공룡이 무섭다고 소리 지르는 여자 얘들과 달리 다이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글도 유창하게 읽지 못하는 다이나지만 실은 공룡의 긴 이름을 철자에 맞게 쓸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 날도 역시 다이나는 도시락이 없었다. 쓸쓸한 시간, 혼자 이구아노돈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낸다.


- 다이나가 은근 용감해요.

- '브론토사우르스' 같은 긴 이름을 쓸 수 있는 걸 보면 다이나가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니에요.


어린이들은 다이나의 장점을 찾아냈다. 하지만 책 속 친구들과 선생님은 우리가 아는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 다이나는 쿨한 척했지만 모두 도시락을 먹으러 간 뒤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도시락을 챙겨 주는 엄마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25쪽)



그동안 다이나가 '지겨워, 지겨워'라고 말했던 것은 '엄마가 있으면 좋겠어'의 다른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암호문 같은 다이나의 말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당연히 해독할 수도 없었다. 드디어 다이나는 조력자를 만난다. 바로 이구아노돈이다.


다이나의 말을 엿들은 이구아노돈은 다이나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그리고는 엄청나게 큰 손으로 다이나를 안고 엄마가 아기를 흔들듯이 흔들어준다. 그리고는 다이나에게 도시락을 만들어준다. 나뭇잎 샌드위치와 데이지 꽃다발, 공룡주스까지.



다음날 다이나에게 굉장한 일이 일어난다. 온몸이 딱딱하고 거대해졌다. 공룡주스를 마신 다이나는 공룡으로 변한 것이다.


다이나는 놀란 나머지 아빠와 병원을 찾지만 별 해결책을 얻지 못한 채 학교에 간다. 교실은 다이나가 꼬리 한 번만 털썩 휘둘러도 난장판이 되었다. 다이나는 남자 어린이들과 한바탕 엉켜 싸우라고 했고 여자 어린이들에게 물을 뿜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도 다이나를 싫어하지 않았다. 도리어 재미있어 했다. 선생님까지 다이나 꼬리에 올라타며 즐거워했다.


다이나는 아버지도 공룡이 된 다이나 등에 올라서서 유리창을 닦았다. 사람들은 돈을 내가면서 이 광경을 구경했다. 다이나는 아버지와 오랜만에 수영장에 가서 즐겁게 놀기도 한다. 그리고는 그날 밤 행복하게 잠이 든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다이나는 다시 어린 소녀가 되어 있었다.

다이나가 중얼거렸다.

'아이, 시시해.'

하지만 다이나에게도 공룡주스가 남아있었다.

그것도 거의 한 병 가득히......(68쪽)


다이나는 하루 만에 현실로 돌아왔다. 판타지 같은 하루를 경험하면서 다이나는 친구와 선생님, 아버지가 주변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다음 날 공룡이 아닌 소녀로 돌아왔지만 더 이상 다이나는 지겨워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시시해'라고 말했다.


다이나에게 공룡은 무엇이었을까, 공룡이 만든 도시락은 다이나에게 어떤 힘을 발휘한 것일까. 어린이들은 알아차렸다.



- 이구아노돈이 엄마처럼 행동했다. (길종찬)


그렇다. 이구아노돈은 바로 엄마였다. 다이나의 '지겨워'라는 말과 잦은 실수, 글자를 잘 읽지 못하는 것들은 엄마의 결핍, 부재에서 오는 것이었다. 다이나는 공룡이 된 뒤 아버지를 비롯한 주변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그건 즐거운 경험, 추억이었다.


다이나는 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것을 얻었다. 다이나 아버지는 역시 중요한 것을 경험했다. 다이나와 즐거운 놀이를 하면서 추억을 만든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 다이나에게는 언제든지 쓸 수 있는 비장의 무기, 공룡주스가 있었다.


- 공룡이 도시락을 다이나에게 선물한 것이 감 동적이다. (박지우)

- 공룡이 다이나를 들어 올려서 안아준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공룡주스는 무엇일까?(이나윤)

- 다이나는 엄마가 없어서 속상하겠지만 아빠는 새엄마를 만났으면 좋겠다.(유현서)


유년기의 모든 어린이들은 저마다 결핍이 있다. 그걸 조금이라도 채워줄 수 있는 것이 공상이나 상상, 판타지 세계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들은 현실에서 부족한 것을 상상의 세계를 경험하며 치유하기도 하는 것이다.


혼자 있는 어린이를 보면 마음이 쓰인다. 어떤 어린이는 유치원 때부터 한 번도 단짝이 없었다는 슬픈 고백을 하기도 했다. 이런 어린이는 쉬는 시간 친구들이 어울려 게임을 할 때 책상에 앉아 책을 본다.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점심을 먹고 나면 혼자 교실로 돌아오거나 빈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다.


돕고 싶은 마음에 애를 써보았다. 어린이 손을 잡고 점심 나들이를 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짝지어 산책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보기도 했다. 노력한 끝에 혼자인 친구를 존중할 수 있도록 교실 분위기를 만드는 데까지는 어느 정도 도달하곤 했다. 하지만 친구를 만들어 주는 일은 쉽지 않았다.


혼자인 어린이 중에는 날마다 친구들 사이로 들어가 보려고 전투적인 노력을 하면서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림책 <나랑 같이 놀자>의 주인공처럼 조용히 있으면 친구들이 다가올 수도 있는데 그 틈과 리듬을 만드는데 서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그만두고 자신만의 세계 속에 있는 어린이도 있다. 이런 어린이들은 혼자 있다 보니 친구와 어울릴 얘깃거리도, 놀이 능력도 부족해져서 계속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제는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나의 유년기에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소공녀>다. 하루 아침에 귀한 존재에서 부엌데기가 돼버린 소공녀, 소공녀는 부엌일을 하고 다락같은 허름한 곳에서 잠을 잤다. 하지만 누추한 자신의 현실을 아름다운 공간으로 생각하며 어려움을 견딘다.


어머니도 그렇게 했다고 들려주셨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소공녀처럼 멋진 상상을 하며 견디었다고 했다.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화의 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자꾸 동화를 읽어주곤 했던 것이다. (*)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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