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驕慢)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짐”이라 되어 있다. 좀 더 풀어 말하면, 교만은 거짓된 명예나 헛된 영광을 좇으며, 자신의 지위나 능력, 성취, 외모를 근거로 남을 낮추어 보는 태도다. 이 말에는 자만(自慢), 오만(傲慢), 거만(倨慢) 같은 여러 부정적 의미가 함께 얽혀 있다. 영어의 arrogance, haughtiness, hubris, conceit 역시 비슷한 뉘앙스를 지닌다.
고대부터 사람들은 교만을 혼을 병들게 하는 가장 깊은 악덕으로 여겨왔다. 교만은 단순한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중심을 흐리게 하는 내면의 왜곡이다. 마음이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면, 타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하늘과의 관계에서도 단절이 생긴다. 종교 전통이 교만을 죄악의 뿌리로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만은 삶의 근원을 잊게 만드는 착각의 힘이다.
사람이 교만에 빠질 때 가장 먼저 흐려지는 것은 시선의 방향이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되 동시에 타인을 본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자기 안에 갇혀 세상을 위에서 내려다본다. 시선이 위로 올라갈수록 타인은 작아지고, 마음에는 더 많은 헛된 영광이 필요해진다. 만족은 줄어들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커진다. 같은 눈높이에서 타인의 가치를 인정하기보다, 스스로의 우월함을 확인하려 드는 마음이 앞선다.
그 결과,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 허영으로 부풀어 오르고, 관계는 굴종과 복종, 그리고 불신으로 메말라 간다. 교만은 결국, 관계를 파괴하고 마음의 시야를 좁히는 내면의 어둠이다.
교만은 또 다른 악덕들을 낳는다. 무시와 분열, 경쟁과 탐욕이 그 뒤를 따른다. 스스로를 높이려는 마음은 타인을 낮추어야만 유지되기에, 교만은 결국 사회적 갈등의 불씨가 된다. 관계의 균형이 무너질 때 공동체는 분열하고, 그 안의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교만은 그렇게 외로움의 씨앗이 된다.
그렇다고 모든 ‘자랑(pride)’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자랑은 자신이나 공동체의 성취에 대한 건강한 자긍심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미덕의 균형에서 비롯된 자존감으로 보았다. 자신이 노력한 결과를 기뻐하거나, 공동체의 선한 성취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I take pride in what I do.”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진다.
“Parents take pride in their children’s success.”
부모는 자녀의 성공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런 자부심은 자신과 타인 모두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반대로, 남보다 위에 서고자 하는 우쭐댐의 자랑은 자만과 오만으로 변질되어, 자신을 스스로의 우상으로 만든다. 그 순간부터 혼은 닫히고, 관계는 메말라진다.
따라서 “자랑(pride)”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뿌리가 자긍심인지, 아니면 교만인지 분별해야 한다. 전자는 혼을 단단히 세우지만, 후자는 혼을 허물어뜨린다.
겸손은 약함이 아니라, 내면이 제자리를 찾는 일이다. 세상의 중심에 서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고, 경쟁보다 협력을, 욕망보다 절제를 택한다. 교만이 무너뜨린 것은 질서이고, 겸손이 세우는 것은 관계이다. 겸손이 회복될 때, 삶은 다시 조화를 이루고, 혼은 제 빛을 되찾는다. 그것이 곧 사유의 평형, 그리고 혼이 자라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