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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상석 Jan 14. 2023

단테는 낙원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가 쓴 신곡(the divine comedy)은 지옥(the inferno), 연옥(the purgatory), 낙원(the paradise) 세 편으로 나뉘어 있다. 지옥과 연옥 편은 낙원 편에 비해 비교적 읽기가 쉽다. 지옥과 연옥 편은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묘사가 많다. 지상에서 경험하는 악한 정신은 지옥의 그것과 아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낙원 편은 공간적인, 시각적인 묘사가 거의 없다. 그래서, 낙원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으로 꼽힌다. 단테도 철학이나 신학의 교양이 부족한 독자들에게 낙원은 어렵다고 말해 준다. 잘못하면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으므로 미리 돌아가라고 권한다. 

         월계관을 쓴 단테는 다음과 같이 낙원에 대한 노래를 시작한다 (낙원, 제1곡).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분의 영광은 온 우주에 침투하지만 어떤 곳에는 많이, 또 다른 곳에는 적게 비춘다. 나는 그 빛을 가장 많이 받는 하늘에 있었고, 그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이라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보았다.

         단테는 낙원의 뚜렷한 특징인 하느님의 영광과 빛을 노래하면서 그의 시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보았다”라고 말한다. 단테가 복음서와 바울 서신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어떤 식으로 낙원을 묘사할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낙원 편은 많은 부분이 낙원에 거하는 영혼들과의 만남과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면, 단테는 아홉 개의 하늘 중 월천에 도착해서, 베아트리체에게 질문하고 답변을 듣는다. 수성의 하늘에서는 수많은 영혼을 만나서 ‘의지와 자유,’ ‘서원의 가치’ 등에 대해 질문하고 답변을 듣는다.

         단테가 낙원에서 행복한 영들에게 “더 많이 보고 더 가까이 있기 위해 더 높은 장소를 열망하는지요?라고 물었다. 그들이 대답했다. 

형제여, 사랑의 힘은 우리의 의지를 평온하게 하니, 단지 우리가 가진 것만 원하고 다른 것에 목말라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더 높이 있기 원한다면, 우리 욕망은 우리를 이곳에 배치하신 그분의 뜻에 어긋날 것입니다. 그런 일은 하늘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대가 사랑의 본성을 잘 살펴본다면 여기서는 필히 사랑 안에 있어야 합니다. 
또한 성스러운 의지는 우리들의 의지와 하나를 이루고 있으니, 그 안에 있는 것이 이러한 축복을 받음에는 본질적이지요. 그러니 이 왕국에서 우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은, 우리의 의지를 당신의 의지로 만드시는 하느님과 온 왕국이 좋아합니다. 

         단테는 비록 최고 선의 은총이 똑같이 내리지 않을지라도 하늘에서는 모든 곳이 낙원임을 깨닫게 되었다. 단테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으나 훌륭한 덕성을 가졌던 사람들도 낙원에 오를 수 있는지 질문한다. 이 질문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논하는 사람도 없고, 읽거나 쓰는 사람도 없는 인도의 한 강변에서 한 사람이 태어나는데, 그의 모든 의지와 훌륭한 행동은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해 볼 때 삶이나 말에서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는 세례도 받지 않고 믿음도 없이 죽습니다. 어떤 정의가 그를 처벌합니까? 믿지 않는다고 그의 죄가 어디 있습니까? 

독수리 형상을 이룬 한 무리의 영혼에서 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오 지상의 동물들이여, 조잡한 정신들이여! 스스로 선하신 최초의 의지는 최고의 선인 당신에게서 떠난 적이 없노라. 그 의지에 화답하는 것은 정의로우니, 창조된 어떤 선도 그것을 이끌지 못하고, 그 의지가 비치어 선을 낳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이전이나 이후에, 그분을 믿지 않은 자는 이 왕국에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보아라. ‘그리스도여, 그리스도여!’ 외치는 많은 사람들이 심판 때는 그리스도를 몰랐던 자보다 그분에게서 더 멀리 있게 될 것이다. 

         단테는 독수리 형상을 이룬 한 무리의 영혼이 ‘우리’와 ‘우리 것’ 대신 ‘나’와 ‘나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낙원의 영혼들은 여러 형태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공동체의 일원은 자신이 소속한 공동체를 가리켜 ‘우리’라 칭하지 않고 ‘나’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낙원에서 무슨 소유가 있다면, 우리 것은 나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마, 이러한 사상은 신곡의 배경이 되는 중세 기독교 철학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단테는 낙원의 영혼들에 주로 질문을 하지만, 질문을 받기도 한다. 성 요한은 단테에게 사랑의 덕성에 대해 질문한다. 단테는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떻게 완성되는지 대답한다. 단테의 대답에 축복받은 영혼들이 노래로 화답한다. 

         결국, 단테는 천상 영광 안의 하느님을 뵙는 ‘지복 직관’(至福直觀)을 경험한다. 하느님은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인간이 직접 볼 수 있도록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거나 사람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실 때만 가능하다. 성인의 도움으로 눈이 더욱 맑아진 단테는 드디어 하느님의 빛을 직접 바라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관조하게 된다. 그리고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하느님 사랑의 질서를 보게 된다. 

         낙원(the paradise) 서두에서, 단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보았다”라고 말한 후, 눈으로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나 화려함으로 낙원의 영광을 묘사하지 않았다.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은 동료 문인들과 통영과 한산도 일대를 둘러보고,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과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라고 썼다. 그런데, 누가 낙원을 세상의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낙원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식물과 보석조차도 낙원의 영광과 빛을 비유하기 위해 등장할 뿐이다. 어렵게 느껴지는 고대 신화나 위인들의 이야기, 중세 철학도 낙원의 영광과 빛을 드러내기 위해 동원된 수단에 불과하다. 차라리, 단테가 천상의 존재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낙원의 가치와 영성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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