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형으로 세운 나의 16년
전역 후, 나는 다시 세상 속으로 나왔다.
군복을 벗고 처음 입은 셔츠는 어색했고,
세상은 여전히 차가웠다.
손에 쥔 건 이력서 한 장뿐이었다.
‘건축 모형 제작 지원.’
그 문장을 수십 번 읽었다.
군대에서 배운 건 질서와 인내였지만,
이제는 손끝으로 무언가를 세워보고 싶었다.
첫 출근 날,
낡은 철제문을 밀고 들어가자
본드 냄새가 코끝을 때렸다.
톱밥 냄새, 아크릴 자르는 소리,
작은 건물들이 하나둘 서 있는 공간.
“김영 씨, 이쪽이 작업대예요.
오늘은 창문 붙이는 거부터 해요.”
박과장이 말했다.
그는 손끝으로 아크릴을 붙이며 덧붙였다.
“이 일은 정성으로 하는 거예요.
조금 삐뚤면, 건물 표정이 달라져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삐뚤면 표정이 달라진다.
어쩐지 인생도 그럴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손끝이 단단해졌다.
밤새 본드를 붙이고, 새벽에 창문을 달았다.
작업실엔 늘 형광등 불빛이 켜져 있었고,
그 불빛 아래서 나는
조용히 세상을 만들어갔다.
아침 해가 창문으로 비칠 때,
내가 붙인 작은 건물이 반짝였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뿌듯했다.
‘이건 내 손으로 세운 세상이야.’
입사 2년쯤 됐을 무렵,
그녀를 처음 봤다.
단정한 단발머리,
깨끗한 셔츠,
그리고 커터칼 자국이 남은 손끝.
그녀는 나보다 3년 먼저 입사한 선배였다.
“영 씨, 이 부분 도면 다시 봐주세요.”
차분한 목소리.
정확하고, 단호했지만 어딘가 따뜻했다.
그녀는 회사의 고참이자,
내 바로 위 선배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내 바로 위 고참인 상민 선배의 연인이었다.
그 시절 나는
10년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다.
서로의 가족을 알고, 결혼을 약속했던 사이.
그러니, 내 마음이 흔들리면 안 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커피 한 잔이 내 하루를 흔들었다.
“영 씨, 주말에 뭐 해요?”
“그냥 집에 있죠.”
“우리 상민 씨랑 드라이브 가는데,
김영씨도 여자친구랑 같이 나올래요?”
그렇게 우리는
두 커플로 함께 나들이를 다녔다.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고,
노을을 보며 웃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묘한 침묵이 흘렀다.
“김영 씨는 참 조용하네요.”
“조용한 게 편해서요.”
“전, 시끄러운 게 좋아요.”
그녀가 웃었다.
그 웃음이 오래 머물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와 상민 선배의 관계는 흔들렸다.
그녀가 말했다.
“사람 마음이 참 어렵네요.
좋아하는데, 자꾸 미워져요.”
그 말이 내 가슴에도 박혔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고개를 숙였다.
몇 달 후,
나는 10년 된 연애를 끝냈다.
그녀는 울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멀리 떠나 있었다.
미안했다.
그녀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그 후로,
나는 그 선배와 자주 일하게 됐다.
밤새 모형을 붙이고,
커피를 나누고,
조용히 서로의 눈빛을 읽었다.
“이건 왜 이렇게 붙였어요?”
“그게 더 자연스러워 보여서요.”
“김영 씨 스타일이네.”
그녀의 말이 묘하게 따뜻했다.
결국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세상이 뭐라 하든,
마음이 향한 곳으로 걸어갔다.
결혼식은 소박했다.
식장엔 가족과 동료 몇 명뿐이었다.
그녀는 웨딩드레스보다
눈가의 미소가 더 아름다웠다.
“이제 진짜 같이 가는 거야.”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 사람은, 절대 울리지 않겠다.
쌍둥이가 태어났다.
두 아들의 울음소리가 병실 가득 울려 퍼졌다.
“두 분 다 건강합니다.”
의사의 말에 눈물이 났다.
그날,
작은 손 두 쌍이 내 손을 움켜쥐었다.
그 따뜻한 감촉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7년 뒤,
막내 아들이 태어났다.
그날도 병원 복도에 서서
나는 또 울었다.
세상에 내 가족이 하나 더 생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빠가 다 세워줄게.”
나는 아기에게 속삭였다.
“이번엔 건물이 아니라,
우리 삶을 세울 거야.”
그렇게 내 16년의 시간은
건물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랑을 세우는 일이 되어 있었다.
본드와 아크릴 대신
웃음과 책임으로 이어 붙인 세상.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완벽한 모형은
회사 안이 아니라,
우리 집 안에 있었다는 걸.
〈삶을 짓는 남자〉 시리즈 예고
다음 편 ― “삶을 다시 짓는 남자”
: 땅 위에서, 가족을 위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