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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윤 Jun 16. 2022

<나의 해방일지> 속 '추앙'이 지니는 의미

‘추앙’의 행위로 실현되는 아가페적 사랑, 활동으로서의 사랑

 (**<나의 해방일지> 14회까지의 대사를 종합해 해석하여 개인 블로그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나를 추앙해요.” 극 중 마냥 평범해보였던 염미정(김지원)의 입에서 전혀 평범하지 않은 말이 쏟아져 나왔다.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 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추앙이라는 단어는 그 뜻을 살펴보아도 여전히 생경하기만 하다. 작가는 왜 미정의 입에서 이런 낯선 단어가 흘러나오게 했을까? 추앙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를 14회까지의 대사를 종합해 해석해보려 한다.


ⓒJTBC | <나의 해방일지> 공식사진



무조건적인 지지, 아가페적 사랑을 뜻하는 추앙


 극중에서 미정은 추앙이 무슨 뜻이냐 묻는 구씨(구자경)에게 “응원하는 거. 뭐든 될 수 있다. 뭐든 할 수 있다. 응원하는 거.”라고 답한다. 미정이 말하는 이러한 응원은 무조건적인 지지다. 힘들고 지쳐있는 이에게 ‘충고’ 내지는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해 상대의 입장에 개입하여 훈수 두거나 지적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저 상대가 어떤 상황에 있든 온전히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존중하며 극복할 수 있다고 응원해주는 것이다. 매일같이 지적하는 직장 상사, 돈 뜯어 가고는 갚지 않는 전 남친. 허울뿐인 직장 동료와의 관계들. 이 모든 것에 지친 미정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무조건적인 지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추앙이라는 단어를 선택한다. “나를 추앙해요.”라는 대사 뒤에는 “가득 채워지게”라는 말이 뒤따라 나온다. 가득 채워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분히 조건적이어서 그 기준에 부합하려 애쓰느라 우리의 마음을 되려 헛헛하게 만드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 한결같이 응원해주는 ‘추앙’이다. 그래서 미정은 사랑해달라 말하는 대신 추앙해달라 말한다.


 이러한 응원, 무조건적인 지지는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절대적인 사랑, 곧 아가페적 사랑으로 보인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부모에게 받는 이런 사랑 또한 어린 시절에 한정되어있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는 말이 무색할만큼, 어느 정도 크고 나서부터는 많은 이들이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야만 가치 있는 존재로 대우 받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이 어른이 되어 사회에서 받는 사랑은 더욱더 조건적이게 된다. 생애주기에 따라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에 발빠르게 맞춰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 공부를 잘하고, 적절한 직업을 갖고, 남들이 가진 만큼은 가져야 한다. 나보다 잘났지만 그렇다고 너무 잘나서 비교하게 되는 상대와 만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관계 맺는 사람들 역시 나와 어울릴 수 있는 적합한 기준에 맞아 떨어져야만 한다. 이렇게 상대가 지닌 사회적 가치에 따라 달라지는 사랑과 관계의 공허함은 미정과 창희의 대사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누구랑 있으면 좀 나아 보일까. 누구랑 짝이 되면... 그렇게 고르고 골라놓고도 그 사람을 전적으로 응원하지는 않아. 나보단 잘나야 되는데 아주 잘나진 말아야 돼. 전적으로 준 적도 없고, 전적으로 받은 적도 없고. 다신 그런 짓 안 해. 잘 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보내 줄 거야.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 하지 않을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야. 부모한테도 그런 응원 못 받고 컸어, 우리.
-나의 해방일지 6회 中 -


내가 영화를 혼자 봐서 헤어진 걸로 만들고, 걔가 새벽에 딴 놈이랑 톡해서 헤어진 걸로 만들어야 돼. 절대로 내가 별 볼 일 없는 인간인 거 그게 들통 나서 헤어지는 게 아니라! 나도 알아. 걔가 쥘 수 있는 패 중에 내가 최고의 패는 아니라는 거. 더 좋은 패가 있겠다 싶겠지. 나도 알아.
-나의 해방일지 4회 中-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개새끼들도 시작점은 다 그런 눈빛. 넌 부족해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된 것 같은 하찮은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 우리를 지치고, 병들게 했던 건, 다 그런 눈빛들이었다.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자 달려들었다가 자신의 볼품없음만 확인하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관계. 어디서 답을 찾아야 될까?
-나의 해방일지 4회中-

 


 이러한 관계에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질려버린 미정은 ‘추앙’이라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 답을 찾는다. 관계에 지친 미정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길, 즉 구원받길 기다리지 않는다. 구씨에게 추앙해달라 말했지만, 그가 자신을 추앙하길 기다리는 대신 자신이 구씨를 추앙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녀는 정체도 모르고 술만 마시는 구씨를 추앙함으로써 “조용히 지쳐가던” 상황을 스스로 ‘뚫고 나가는’ 것이다.




"우리 진짜로 하는 건 어때요? 해방클럽. 전 해방이 하고 싶어요. 해방되고 싶어요. 어디에 갇혔는지는 모르겠는데, 꼭 갇힌 것 같아요. 속 시원한 게 하나도 없어요. 갑갑하고, 답답하고, 뚫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나의 해방일지 3회 中-



ⓒJTBC | <나의 해방일지> 공식사진


 추앙을 시작하면서부터 미정은 달라진다. 사내 동호회 가입을 원치 않던 그녀는 회피를 멈추고는 조태훈 과장, 박상민 부장에게 ‘해방클럽’ 결성을 제안한다. 또한 정체도 모르고 술만 마시는 구씨를 묵묵히 응원하면서 해방에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구씨로부터 답장이 없어도, 어느날엔 그가 그녀를 무심하게 대해도, 미정은 한결같이 구씨를 추앙하고, 이를 통해 변하게 된다.



"예전엔 시키는 말 외에는 잘 안 했던 것 같아요. 누가 내 얘기를 듣고 싶어 할까.근데 이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얘기를 그냥 해요. 그냥 나와요. 그러면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이 올라와요. 갑자기 내가 사랑스러워요."
-나의 해방일지 9회中-


 그렇다. 미정은 사랑을 갈망하는 대신 ‘추앙’이라는 형태의 온전한 사랑을 상대에게 줌으로써, 자기 내면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여 점점 생기를 되찾는다. 지쳐있던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고, 필요한 말만 하던 그녀가 먼저 옆자리 동료에게 말을 건넨다. 이렇게 미정의 해방은 무조건적인 사랑인 추앙을 통해 실현되는 듯하다. 상대로부터 절대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대신 그녀가 그 사랑을 상대에게 줌으로써 달라진다. 이러한 사랑은 에리히 프롬이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말한 ‘활동으로서의 사랑’에 가깝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에리히 프롬, 『 사랑의 기술 』 中)


 이렇듯 염미정이 보여주는 사랑은 사랑이라고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재고 따지는 계산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를 위하는 절대적인 사랑이다. 그래서 작가는 사랑이 아니라 ‘추앙’이라는 단어를 택한 것으로 보이며, 미정은 추앙의 행위를 통해 사랑으로 가득 채워짐으로써 해방에 가까워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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