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철 (1)
7. 독비도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홍콩 무협 영화는 1966년 발표한 호금전 감독의 < 대취협 > 이후 범아시아적으로 엄청난 붐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렇게 세계적으로 흥행한 무협 영화는 태생적으로 남자들의 의리에 기반을 둔 마초적 성격의 캐릭터들과 폭력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스토리들이었다. (호금전 감독의 영화는 다르지만)
이런 폭력과 마초적 캐릭터를 가장 잘 다룬 이가 홍콩 영화의 대부라 불리는 장철 감독이었다.
중국 영화는 국공내전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고 봐도 될 정도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특히 60년대 문화 대혁명 시기의 중국 영화는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대만도 마찬가지였다. 국공내전 이후 대만에 정부를 수립한 장제스는 정권 구축을 위해 검열에 바빴다. 그러니 영국 총독부 관할이었던 홍콩이 당연히 중화권 영화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홍콩에는 세 제작사가 있었는데, 쇼브러더스(소씨형제 : 워너브러더스의 로고를 모방했던), 국제전영무업유한공사 그리고 골든하베스트다.
하지만 골든하베스트는 거의 신생영화사로 60년대 말에 설립되어 70년대부터 흥행가도를 달리는 제작사가 되었고, 60년대는 거의 쇼브러더스와 국제전영무업유한공사가 영화의 제작과 배급을 놔두고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60년대 중반에 국제전영무업유한공사의 회장이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쇼브라더스의 세상이 10년 동안 펼쳐지게 된다.
호금전 감독이 쇼브라더스와 함께 < 대취협 >을 히트시켰지만 쇼브라더스의 제작환경에 진절머리를 낸 호금전은 제작사를 떠나버린다. 이때 쇼브라더스가 호금전 이후 키운 감독이 장철 감독이다.
이런 장철 감독의 이름을 널리 알린 작품이 바로 < 독비도獨臂刀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이다. 이 영화는 장철 감독의 7번째 영화인데, 이 작품 전만 해도 장철 감독은 감독으로서 이름을 날리지 못했다.
'왕우'를 주연으로 한 이 영화는 당시에 홍콩 달러 100만 불(지금의 100억 원)이라는 전무후무한 흥행기록을 세운다.
< 독비도 >는 북경어로 만들어졌다.
국공내전 이후 중국은 북경어를 표준어로 내세웠고, 홍콩이 그런 거에 상관없이 계속 광둥어를 쓰는 것에 불만을 표했다. 그리고, 40년대에 국공내전을 피해 홍콩으로 유입된 중국인들의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그들의 자녀들이 자라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60년대에 홍콩의 언어는 북경어와 광둥어가 자연스럽게 섞이는 세대가 되었다.
이때 쇼브라더스는 영화를 제작할 때 북경어를 택했다. 홍콩의 원래 언어인 광둥어는 그냥 자막처리를 하거나, 아니면 더빙을 해서 따로 배포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이런 흐름은 홍콩 영화의 지형을 완전히 북경어로 바꾸게 된다. 70년대에 골든하베스트가 이소룡을 만나기 전까지 쇼브라더스는 주야장천 북경어 영화를 만들어 냈다.
왜 언어 이야기를 하냐 하면, 이 두 언어가 주는 느낌이 장르별로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내 느낌으로 광둥어는 보다 소리가 높고, 왁자지껄한 분위기이다. 그러다 보니 대사를 무게 있게 처리해야 하는 장철의 영화보다는 주성치, 성룡 등이 나오는 코미디 영화에 더욱 어울린다.
반면에 북경어는 복수와 의리로 점철된 옛날식 마초들이 나오는 영화에 어울린다.
물론 이후에 영화들을 찍을 때 북경어를 하던 배우들도 광둥어 더빙을 위해 입모양을 맞추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에 선택한 언어가 그 영화의 장르에 절묘하게 맞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장철의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광둥어로 보는 것보다는 북경어로 보는 것이 더욱 영화에 몰입하게 된다.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나임에도 그 차이가 느껴진다. 그래서 장철의 영화들을 보고 싶다면 북경어로 볼 것을 추천한다.
장철 감독은 특이하게도 장철 사단이라 불리는 배우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 독비도 >의 주인공 왕우외에도 강대위, 적룡 (< 영웅본색 1,2 > 에서 장국영의 형으로 나온), 부성, 진관태 등 다양한 배우들과 여러 편의 협업을 통해 가장 의리 있는 감독으로 불렸다. 그리고 이런 장철 사단의 힘은 홍콩 영화계에 스타시스템을 불러 올 정도였다.
그 첫 출발점이 < 독비도 > 였다.
< 독비도 > 는 많은 촬영을 스튜디오 안에서만 진행했다. 세트를 지어두고 촬영을 했기에 호금전의 영화에 비해 수려한 풍광이나 절제된 무술 동작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름을 알린 이 영화는 신체훼손이라는 강렬한 표현부터 시작한다.
주인공인 왕우가 도입부부터 팔이 잘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신체훼손의 모티브는 장철의 모든 영화를 관통하다시피 한다. 다리가 잘리거나 무기가 온몸을 꿰뚫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나중엔 이런 신체훼손을 안고 복수를 염원하는 주인공들을 모아두고 < 잔결 > 이라는 영화까지 만든다.
장철에게 있어서 폭력의 완성은 신체훼손에서 시작해서 신체훼손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독비도 > 에 있어서 음악은 큰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아니 단 한순간만 발휘하면 되었다.
바로 캐릭터가 죽는 순간이다. 캐릭터가 죽는 순간에 그는 항상 음악 같은 사운드를 삽입했고, 이 사운드가 나한테는 음악인지 효과음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이지만 관객들에게는 죽음의 순간이나 폭력의 순간에 다가오는 충격의 극대화를 일으킨다.
장철 영화에서는 악역이든 주역이든 죽을 때 서부 영화처럼 절대로 그냥 쓰러지지 않는다. 캐릭터들은 죽을 때 몸부림을 치지도 않는다. 단지 신체훼손으로 인해 온갖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죽는다. 그것도 바로 쓰러지지 않고 스틸컷처럼 서 있다가 바로 다음 컷에서 쓰러져 죽는다.
장철은 < 독비도 > 부터 시작된 초창기 Phase 1 에서는 슬로우모션을 거의 쓰지 않았다. (Phase 2 에 가까워지면서 많이 쓰기 시작하지만) 하지만 신체가 훼손당한 채로 죽는 모습들을 다른 액션 장면에 비해 긴 시간과 사운드를 넣어 극대화시킨다. 마치 그 고통을 관객이 직접 체험해 보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그는 초창기에 슬로우모션을 쓰지 않는 대신 빠른 컷과 빠른 스피드의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 애썼다. 즉, 무술 액션의 속도감을 배가시키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래서 장철은 페킨파가 고속 촬영을 선호했다면 그 반대인 저속 촬영을 선호했다. 어쩔 땐 초당 8 프레임이라는 무시무시한 저속 촬영을 진행해 실제 상영에서 보다 더 높은 속도를 관객들이 체감하길 바랐다. 상영 시에는 무조건 초당 24 프레임이 돌아가야 하는데, 초당 8 프레임으로 찍으면 속도감이 3배로 빠르게 보인다.
그리고 컷 자체도 빠른 편집을 통해 스토리를 심플하게 만들고, 액션 컷도 당연히 빠른 컷들을 구사해 서부 영화의 대결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컷들을 경험하게 한다.
사실 이 부분은 호불호가 갈린다. 그 많은 컷들로 인해 어쩔 때는 액션 자체가 유치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서부 영화에서 결투 전의 분위기를 타기 위해 많은 컷들을 느리게 이어 붙였다면 (세르지오 레오네), 장철은 분위기보다는 실제 액션 장면의 쾌감을 강조하기 위해 < 독비도 > 에서 많은 컷들을 빠르게 이어 붙였다.
그리고 < 독비도 > 는 철저하게 스튜디오 내부 세트에서 촬영이 이루어졌다. 호금전 감독과는 전혀 반대다. 이는 쇼브라더스의 제작환경과 맞물려 있다.
쇼브라더스는 < 대취협 >의 대박 이후 이런 영화들을 다량으로 만들어내길 원했다. 홍콩 영화의 각종 장르 영화가 망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복제가 대량으로 이루어진 때가 이때부터였다. 헐리웃의 메이저 스튜디오가 세트 촬영을 통한 서부 영화의 대량 생산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이후 쇼브라더스는 < 독비도 > 로 대박을 터트린 감독을 부려먹기 위해 쉴 새도 없이 그를 부려 먹는데, 장철 감독의 작품이 100여 편에 가까운 것이 마냥 그의 의지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970년도 초반에 장철 감독은 1년에 거의 8편씩을 개봉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이건 헐리웃 스튜디오 황금기 시대의 양산 능력조차 압도하는 미친 짓이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 로케이션보다는 바로 옆으로 가서 다른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스튜디오 세트 방식을 고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감독 자신도 많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지만, 이런 대량 생산은 결국 자기 복제라는 한계를 넘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장철 감독은 홍콩 영화의 대부는 될 수 있을지언정 호금전 같은 세계적인 거장은 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영화들이 비슷비슷했다.
하지만 분명 홍콩 영화에서 그의 행보는 중국 반환 이후에도 홍콩 영화가 연명할 수 있는 힘을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감독들이 그의 작품을 따라 해서 연출을 시도했고, 이후에 서극과 오우삼에 의해 홍콩 느와르나 무협판타지 같은 여러 새로운 장르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영향이 매우 컸다.
호금전 감독이 예술적 경지의 작품들로 홍콩 무협 영화를 한 차원 높게 업그레이드했다면 장철 감독은 폭력으로 점철된 작품들로 홍콩 영화의 상업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있었고, 이런 장철 감독에게 보내는 홍콩 영화인들의 경외는 그렇기에 당연한 것이다.
장철 영화감독의 영화 중 난 항상 < 독비도 >를 먼저 추천한다. 이 영화는 도입부터 시작한 신체훼손과 더불어 묵직하면서도 옛 사부와 자신을 구해준 연인에게도 의리를 지키는 마초 캐릭터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이후 영화에서도 계속적으로 복제되고 제작된다.
물론 Phase 2 부터 시작한 남자들의 브로맨스를 바탕으로 한 비장미는 없다. 하지만 장철 감독 특유의 피칠갑 연출과 신체훼손이 시작된 이 영화를 놓친다면 장철 영화의 관람을 시작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장철 감독의 시작과 끝을 엿볼 수 있으며, 이후 장철 감독의 Phase 2 와 Phase 3 에서도 이런 부분이 관철됨을 알 수가 있다.
즉, 장철 감독은 마초 캐릭터와 신체훼손이라는 두 가지 재료를 김용의 '신조협려' 스토리를 가져와 시작했고, 이 두 가지 재료에 브로맨스를 섞어 비장미를 강화한 것이 적룡과 강대위의 시대인 것이다.
아주 옛날 옛적에 영화판에서는 분명 장철 감독이 홍콩 영화 그 자체였던 시대가 있었고, 지금 홍콩 영화의 명맥을 그나마 잇고 있는 유덕화나 양조위 같은 배우들도 그에게 항상 경외와 헌사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장철이 영화를 만들던 시대에는 중국과 대만의 영화는 없다시피 했다.
그렇기에 중화권에서 장철 감독의 영화들은 독보적이고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장철 영화의 시작, < 독비도 > 를 꼭 한번 감상해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