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광의 복고가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시즈오카 차(茶)들을 압바스 칼리프가 있는 바그다드까지 실어 나르기 위해 송나라 황제 신종은 원양항해를 견딜 수 있는 배를 건조하도록 명령했다. 만곡(萬斛)을 실을 수 있다고 해서 만곡선(萬斛船)이라고도 불린 그 배는 신종이 건조를 명령했다 해서 신주(神舟)라고 불렸다. 당시 열 말(一斗)을 한 곡(斛)이라 했기에 만곡은 십만 말로 지금 기준으로 2000톤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배였다. 따라서 신주에 화물로 실린 값비싼 차들을 노린 해적들과 각 기항지에서의 도적들 공격에 대비해 해병들을 수군과 함께 조련시켜 승선케 했다. 총인원은 대략 한 척의 신주에 200명 정도가 승선했다. 그들이 사용할 무기로는 왕안석의 제안으로 1070년에 신설된 군기감(軍器監)에서 화약의 성능을 개선하고 화약을 사용해 효과적으로 바다에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해 새로 건조한 무역선에 장치(裝置)했다. 화포였다. 선박(船舶)의 개념을 넘어 함선(艦船)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1078년에 만들기 시작해 1080년부터 운항을 시작했던 신주는 두 척(隻)이었다. 허공을 뛰어넘어 편안하게 바다를 건너 먼 곳까지 다다른다는 뜻의 능허안제치원신주(凌虛安濟致遠神舟)가 제1선이었고 바다를 신령스럽게 잘 넘어간다는 뜻의 영비순제신주(靈飛順濟神舟)가 제2선을 맡았다. 6척으로 구성된 예하 선대를 이끌고 총 8척의 함대가 1선과 2선으로 출항하는 건 장관이었다. 이렇게 황차가 되어 고려를 떠나 바그다드에 하역되어진 시즈오카 차(茶)는 약(medicine)으로 분류되어 약국(pharmacy)에서 판매되었다. 오늘날 절구통과 절구공이로 상징되는 약국은 바그다드에서 시작된 것인데 이런 바그다드의 약국들은 차(cha, pha)가 신주(神舟)에 실려 대량으로 바그다드에 공급되었기 때문에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는 당나라 황제 현종(玄宗) 때인 741년에 지금의 광동항에 처음 설치된 외국인 거주지역 번방(蕃坊)과 시박사(市舶司)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약국 표시로 공이가 절구통에 담긴 모습이 사용된 것은 당시 약국(phamarcy)에서 손님들에게 차(cha, 茶)를 절구에 갈아서 판매했기 때문이었다.
시즈오카 차(茶)들을 신주(神舟)와 같은 거대한 범선(帆船)으로 운반해 대량으로 공급했기에 유럽인들도 이전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차(茶)를 이용할 수 있었다. 말들과 나귀, 낙타로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없는 물량을 단기간에 그것도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해양운송만의 장점 때문이었다. 물론 압바스 제국의 백성들과 달리 향료(香料)로 이용하는 수준이었어도 그 효능감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런 시즈오카 차(茶)가 송 황제 신종이 죽어 왕안석의 신법이 폐지되고 이어 고려에서는 의천이 실각하는 등 1085년부터 시작된 일련의 혼란으로 공급 물량이 줄더니 급기야 1089년부터는 공급이 완전 중단되어 버렸다. 1094년 차(茶)가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유럽인들의 모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로마 교황 우르반 2세는 십자군 전쟁을 선언하고 시즈오카 차(茶)를 공급하던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로 진격할 것을 크리스천들에게 명령했다.
※ 표지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