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린 로드파와 실크 로드파
북송의 신종(神宗)이 죽고 12살의 어린 아들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신종의 어머니인 태황후는 손자를 대신해 섭정을 선포하고 사마광을 재상에 임명했다. 재상이 된 사마광은 왕안석의 신법을 폐지해 신종대에 고려와 일본에 행해진 정책을 백지화했다. 1085년부터 할머니 태황후가 죽고 철종이 친정을 하게 된 1094년까지 고려의 내부 노선 투쟁은 가열되어갔다. 시즈오카의 차(茶)들을 중계무역 함으로써 엄청난 자금을 획득하게 된 고려 왕실은 주도권을 장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어진 변화에 당황하고 있었다. 흥왕사(興王寺) 초대 주지로서 천태종단을 조직해 고려왕실이 지배하는 차(茶) 무역망을 새로 만들어낸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불안정해진 정세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인 인예 태후(仁睿太后)의 청원을 내세워 천태종 본산(本山)으로 삼을 국청사(國淸寺) 건설을 개경에서 시작했다. 이는 시즈오카에서 들여오는 차(茶)를 가공해 전 세계로 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포기 하기는커녕 오히려 확장해 나갈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송나라의 정세 변화를 등에 업고 시즈오카 차(茶)를 수입 못하게 하려는 기존 차(茶) 무역망 지배자인 김제(金堤) 금산사를 본산으로 하는 법상종단의 압력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었다. 경원 이씨 가문에 의해 주도되는 법상종단에 맞서 같은 가문 출신인 어머니 인예 태후가 청원한 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천태종 본산으로서 국청사를 새로 짓는 일은 차(茶) 무역망 지배권을 고려왕실이 내놓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1089년 완공 단계에 있던 국청사(國淸寺)에 원인 모를 큰 불이 일어나 잿더미가 되는 화재사고가 일어났다. 시즈오카에서 수입된 차(茶)들이 선금을 받고 황차로 만들어지고 있던 건물들도 모두 불에 탔다. 국청사가 불타자 의천이 크게 중창한 승주목(昇州牧) 선암사(仙巖寺)에 수입해 놓은 시즈오카 차(茶)들이 반출되지 못한 채 쌓여져 변질되고 있었다. 국청사에서 일하거나 일하도록 되어있는 승려들도 모두 실업자가 되어 굶어 죽을 판이었다. 주어진 기한 내에 전 세계 차(茶) 상인(merchant)들에게 계약한 양만큼 시즈오카 수입차(茶)를 가공해서 황차로 만들어 공급하지 못하면 고려 왕실은 외상대금을 갚지 못해 파산할 수도 있는 지경으로 몰리고 있었다.
* 고려의 법상종은 김해의 감로사(甘露寺) - 대구 동화사(桐華寺) - 속리산 법주사 - 김제 금산사와 개풍 현화사(玄化寺)로 이어지는,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 없는 굳건한 차 유통망을 구축해 놓았다. 이에 대각국사 의천이 조직한 천태종은 승주 선암사(仙巖寺)와 나주 불회사(佛會寺), 합천 해인사 - 칠곡의 선봉사(仙鳳寺) - 제천 월악산(月岳山) 무암사(霧巖寺) - 개풍 흥왕사(興王寺)와 개경 국청사(國淸寺)로 이어지는 유통망으로 대항했다. 소림사에서 알 수 있듯 사찰들과 사원들이 승병(僧兵)을 키우는 이유는 수송되는 차(茶)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사찰과 사원들이 해자(垓子)와 다리를 설치하고 무암사처럼 성곽을 두른 것과 같은 담장을 올리고 높은 축대(築臺) 위에 지어진 이유이기도 했다. 별도의 숙박시설과 주고(廚庫: 절의 부엌시설)를 갖춘 사찰(寺刹)을 사원(寺院)이라 했다.
결국 고려 국가재정으로 손실을 보전해 주던 형 선종(宣宗)이 1094년에 죽고 그의 어린 아들 헌종(獻宗)이 뒤를 잇자 의천은 천태종단의 재정파탄을 책임지고 흥왕사와 국청사 주지(住持) 자리를 내놓고 합천 해인사로 쫓겨나야 했다. 의천이 해인사로 쫓겨가 개경의 천태종 본산인 흥왕사가 무주공산이 되자 이자의(李資義)는 시즈오카에서 들어온 차(茶)들을 빼앗기 위해 움직였다. 순천 선암사(仙巖寺)와 합천 해인사에 쌓여있는 시즈오카에서 수입한 차(茶)들이 속리산 법주사와 김제 금산사 등으로 반출되어 나가고 있었다. 그때 송나라에서 태황후가 죽고 철종이 친정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094년 친정(親政)을 시작한 철종은 아버지 신종의 대외정책을 복원할 것임을 고려에 알려왔다. 훗날 숙종이 되는 문종의 셋째 아들 계림공(鷄林公)이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였다.
고려 왕실의 재산을 경원 이씨로 대변되는 귀족 사원 세력이 차압하는 형국을 계림공은 이자연의 손자 이자의의 목을 차도살인(借刀殺人)으로 베는 것으로 그 죄를 물었다. 형 선종의 아들 헌종은 폐위되었고 동생 대각국사 의천은 해인사에서 다시 개경 흥왕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버지 문종으로부터 왕실을 부흥시킬 유일한 왕자(文宗愛之 嘗曰 後之復興王室者 其在爾乎)로 적시되었던 계림공은 친정을 시작한 송 황제 철종의 지지를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숙종(肅宗)이었다. 수 양제(隋 煬帝)를 지원해 황위에 오르게 하고 지의(智顗) 대사가 이룩한 천태종단(天台宗團)을 고려와 일본에도 구축한 마린 로드파와 당 태종(唐 太宗 )을 지원해 황위에 오르게 하고 자은(慈恩) 대사 규기(窺基)를 앞세워 자은종파(慈恩宗派: 법상종 法相宗)를 당나라와 신라에 구축해 천태종단을 억누르게 한 실크 로드파 간의 싸움은 이제 고려로 이어졌다.
※ 표지 사진 출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