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숙종의 정변과 경원(인주) 이씨
송나라 신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해 할머니 태황후가 섭정에 들어가 왕안석의 신법에 의한 정책들을 모두 폐지해 버리자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지를 두고 내부 갈등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1074년 문종이 사신단을 꾸려 송나라에 파견한 이래 고려의 대송 입장은 협력을 강화하면서 경제적 실리를 최대한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송나라와 일본 사이의 해상교류는 당시 해양운항에 필요한 조선술 및 천문학 등 과학기술 수준을 놓고 판단할 때 고려의 적극적이고 호혜적인 협력이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본이 서로 적대하던 신라를 피해 당나라로 견당사를 파견하던 8세기와 9세기 시절 소위 남로(南路)라 불리던 사단 항로(斜斷航路)를 이용해 총 15차례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했었는데 신라의 도움 없이 당나라 해역에 도달한 건 오직 한차례, 13번째 견당사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흐르는 쿠루시오 해류는 남중국해에서 북동으로만 흐르는 해류여서 중국에서 일본으로 운항하는 선박은 주산군도에서 초여름(6-7월)에 출항하면 큰 어려움 없이 일본의 하카타(博多)항에 들어설 수 있었으나 문제는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는 항로였다.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항로는 일본 하카타항에서 출항한 후 고려의 청해진에서 기항(寄港)해 맹골수도(孟骨水道) 같은 고려 연안의 험한 조류를 잘 아는 고려인 선원들 10여 명을 수로 안내인으로 태운 후 남해안을 돌아 서해연안으로 북상하다 장산곶에 고려인 선원들을 하선시킨 후 산동반도를 향해 횡단하는 소위 중부 횡단항로(中部橫斷航路)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항로는 신라와 백제, 고구려가 일본 차(茶)의 중계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던 7세기 초반 경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의 대중국 무역로를 차단하기 위해 전통적인 북부 연안항로(北部沿岸航路)를 폐쇄함으로써 그 대안으로 개발된 항로였다. 신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도 이 항로를 개척해 냄으로써 일본 차(茶)를 중국에 계속 중계 무역할 수 있었고 결국 그 교역에서 얻은 경제적 이익으로 한강 유역을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고 끝내는 삼국을 통일하는 저력을 갖게 되었다.
모든 국가 간 전쟁은 반드시 경제적 이익의 분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고 모든 길은 반드시 차(茶)와 같은 인간 생활에 꼭 필요한 물자를 교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신라가 만든 중부 횡단항로는 신라로(新羅路)라 불렸다. 이렇듯 일본에서 송나라로 돌아가야 하는 선박은 고려의 협조가 절실했는데 고려 왕 문종은 마지막 재위 10년 동안 송나라 신종의 무역정책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고려에 안겨주었다. 그런 문종이 1083년에 죽은 후 그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 의천은 새로 왕이 된 둘째형 선종의 묵인 하에 송나라 천태종단의 초청으로 송나라에 밀항했다. 의천이 송나라와의 더 높은 차원의 고밀(高密)한 경제 군사협력을 논의하던 중 송(宋) 황제 신종이 1085년에 죽고 새로 재상(宰相)이 된 사마광이 왕안석의 신법을 폐지하는 사변이 일어났다. 고려의 새로운 왕 선종(宣宗)은 동생 의천(義天)을 급거 고려로 불러들이고 이후 고려는 일본 시즈오카 차(茶)의 중계권을 두고 대송 관계를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를 두고 내부 노선투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린 송 황제 철종 대신 섭정을 맡은 신종의 모후인 태황후(太皇后)는 왕안석의 신법으로 포장된 신종(神宗)의 대일본 정책과 대고려 정책을 백지화해버렸다.
고려왕 선종(宣宗:문종의 둘째 아들)은 동생 의천을 내세워 일본 천태종과의 불교 협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일본 차(茶) 교역을 대폭 증대시켰다. 새롭게 확보한 시즈오카산 차(茶)들은 이제 더 이상 경원 이씨와 안산 김씨의 법상종단의 것이 아니었다. 차(茶)는 물량만 확보할 수 있다면 내다 팔 시장은 무궁무진한 그 자체가 은(銀) 덩어리인 잎들이었다. 돈을 셀 때 한 잎 두 잎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찻잎이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고려는 현종이 남긴 황차라는 차를 약(藥)으로 바꾸는 최첨단 제조기술을 가진 기술 강국이었다. 부왕인 문종이 개경에 창건한 흥왕사(興王寺)를 중심으로 국청사(國淸寺)를 개창해 합천 해인사와 승주목(昇州牧)의 선암사(仙巖寺)에서 일차 가공된 시즈오카의 차(茶)들을 나주목(羅州牧)의 불회사(佛會寺)를 통해 조운(漕運)으로 수송해 와 개경에서 모두 최종 가공한 뒤 중부 횡단항로를 통해 송나라와 요나라로 수출하는 무역 유통망이 형성되었다. 그 모든 것은 고려 왕실의 직접 통제로 경영되고 있었다. 오랫동안 차(茶) 시장 독점권을 유지해 왔던 경원 이씨로 대표되는 문벌귀족 사원 세력들의 불만이 노골화하기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선종이 죽고 어린 아들 헌종(獻宗)이 즉위하자 경원(慶原) 이씨로 대표되는 문벌귀족 사원(門閥貴族寺院) 세력들은 왕을 택군(擇君)하려는 노골적인 세도정치를 시도했고 이것이 문종의 셋째 아들인 계림공(鷄林松)을 자극시켰다. 결국 계림공은 자신의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왕으로 즉위했다. 계림공은 경원 이씨 가문과 혼인 관계로 얽히지 않은 유일한 왕자였는데 후일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는 숙종(肅宗)이었다.
※ 표지 사진 출처: 우리 역사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