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혈(神穴)에서 민황을 깨달은 고려 태조 왕건의 손자
문종의 부왕(父王)인 현종(顯宗)은 왕족이었으나 사생아였다.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여덟째 아들인 안종(왕욱)이었고 어머니는 고려 5대 왕 광종의 아들인 경종의 비인 동시에 고려 6대 왕 성종의 여동생이었던 헌정왕후였다. 그러나 현종(顯宗)은 어머니 헌정왕후의 친언니이면서 역시 경종의 비로 목종을 낳아 천추태후로 불리던 헌애 왕후와 그녀의 애인 김치양으로부터 끊임없는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토굴 속에 숨어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자신의 아들과 같은 왕위 계승권(왕건의 손자)을 가진 현종(왕순 王詢)을 왕위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 그를 승려로 만든 천추태후는 그것도 모자라 자객들을 여러 차례 보내 죽이려 했다. 진관(津寬)이라는 스님 하나 달랑 있는 암자에 대량원군(大良院君)을 신혈소군(神穴小君)으로 만들어 절로 보낸 후 독을 탄 음식을 보내어 독살시키려 하고 자객을 보내 살해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신혈소군이란 왕의 서자이면서 출가해 스님이 된 왕자를 부르는 호칭이었는데 대량원군(大良院君)이 승려가 되어 신혈소군이 되자 진관스님의 암자는 신혈사(神穴寺)로 불리게 되었다. 결국 승려 진관이 불상을 모신 단(佛壇: 須彌壇) 밑에 판 조그만 토굴 속에 숨어 목숨을 연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현종은 토굴 속에 비상용으로 가져간 차(茶)에서 우연히 황차(黃茶) 제조법을 터득했다.
습기가 가득 찬 좁디좁은 토굴 속에 천으로 포장된 차(茶)들이 현종(顯宗)의 체온에 데워진 공기에 발효(醱酵)가 된 거였다. 고구려 시절 목단강(牧丹江)에서 꽃 피웠던 황차 제조기술이 고구려 멸망 이후 끊어졌다 현종의 고난이 서린 토굴 속에서 부활한 것이었다. 직접 개발한 황차 제조비법 때문에 현종은 요나라 성종의 침략을 받아야 했고 나주까지 몽진(蒙塵)을 떠나야만 했다. 거란인들은 고구려 멸망 이후 사라진 목단강변의 황차가 고려에서 수출되고 있음을 확인하곤 지체 없이 군사를 일으켜 침공했다. 요(遼) 나라의 황제 성종(聖宗)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있었다. 40만 명의 대군이었다. 현종이 50 여기의 친위병들만을 이끌고 개경을 버리고 먼 남쪽 나주까지 몽진(蒙塵)하리라곤 거란 왕 성종도 미처 알지 못했다. 고려왕 현종(顯宗)이 황차 제조기술을 복원한 당사자라는 사실 또한 전혀 알지 못한 아니 상상조차 못 한 성종이었다. 현종은 몽진 중 곳곳에서 고려 왕실에 적대적인 백성들과 생명을 걸고 맞닥뜨려야 했다. 지금의 파주 연천에 해당하는 적성현(積城縣)을 지나갈 때 현종은 백성들에 의해 살해당할 지경까지 몰리기도 했었다. 현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성들이 왜 자신에게 아니 왜 왕에게 적대감을 보이는지 알게 되었다.
성종은 983년 일본 차(茶)를 수입하고 가공하고 수출하는 중요 길목마다 차 산업을 지원하는 기지를 건설했다. 역사에 12목이라 기록된 곳이다. 일본 차를 수입, 가공해 해운(海運)으로 산동반도와 주산군도(舟山群島)로 수출하고 동시에 육운(陸運)으로 서경(西京: 平壤)을 거쳐 북쪽 초원로와 실크 로드로 수출해 기염을 토한 고려의 차(茶) 산업은 그러나 993년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의 침략 후 크게 위축되었다. 소손녕과의 회담을 통해 강동 6주라는 영토까지 할양받으며 큰 손실 없이 전쟁을 끝낸 것으로 알려진 서희의 업적은 그러나 완전한 진실은 아니었다. 일본 차(茶)가 고려로 수입되는 무역로(貿易路)는 쿠루시오 해류(海流)의 영향으로 남해로와 동해로, 크게 두 개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었는데 남해로(南海路)라 불리던 차(茶) 교역로는 서희의 담판으로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해로(東海路)로 불리던, 지금의 울릉도를 거쳐 강릉과 원산지역으로 들어오던 차(茶)들은 서희의 담판으로 더 이상 들어오지 못했다. 요나라는 울릉도를 기항지(寄港地)로 하는 모든 동해(東海)로 교역되던 차 무역(茶貿易)을 독점했다. 동해를 통한 일본 차(茶) 수입금지 조치로 서경(西京)은 경제기반이 붕괴되었고 지금의 파주와 연천지역으로 이루어진 당시의 적성현(積城縣)의 경제는 파멸되었다. 동해로를 통해 수입된 일본의 차(茶)가 집산되어 가공되던 까닭에 경제적으로 번영했던 지역이 적성현이었다. 이 때문에 치열한 영토 쟁탈전이 벌어지던 곳이었고 그래서 각 세력이 축조한 성(城)들이 너무 많아 겹겹이 쌓일 정도다 해서 적성현(積城縣)이라 이름 붙여진 곳이었다.
추워진 기후로 더 이상 차나무가 살지 않는 금강산(金剛山)은 비로봉(毘盧峯)이란 이름만 처연했고 일본에서 수입해 들여와서 가공 수출되던 차(茶) 또한 더 이상 없었다. 당삼채(唐三彩)를 방불(彷彿)케 하는 요삼채(遼三彩)란 도자기(陶瓷器)를 만들어 거란인들이 기술을 뽐낸 건 이런 일본 차(茶) 독점 수입 때문이었다. 여진족을 몰아내고 강동 6주를 고려에 할양한 거란의 의도는 해난(海難)으로 명주(강릉)에 피항(避航)한 일본에서 온 무역선의 차(茶) 마저도 자기들에게 이관(移管)하라는 것이었다. 동해로 오가는 그 어떤 차(茶)도 고려에게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1010년 섣달, 피난길에 오른 현종이 나타나자 적성현 백성들은 자신들을 거지로 만든 고려 왕실에 대한 적개심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현종은 993년 성종 때 체결된 거란과의 무역합의로,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남해로(南海路) 무역을 관장해 온 세력들의 지지(支持)와 지원이 그래서 절실했다. 몽진 길에 충성과 호의를 보여준 공주 부사 김은부(金殷傅)는 안산이 본관이었고 그의 아내 이씨의 본관은 경원(인주, 인천)이었다. 두 집안 모두 본관(本貫)이 터 잡은 지역의 이점 때문에 대대로 산동반도로 오가는 차(茶) 무역으로 성장해 온 집안이었다. 그래서 현종은 그들의 딸 세명 모두와 혼인했다. 그들의 핏줄에게만 왕위를 물려주겠노라 약속했고 그 신표(信標)로 자신이 복원한 황차 제조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경원 이씨 가문은 안산 김씨 가문과 달리 머리 깎고 승려가 되어 후사(後嗣)를 포기하겠다는 아들들이 대대로 나타나 주었고 또한 어려운 황차 제조 기술을 대대로 전수하는데도 성공했다. 경원 이씨 가문이 사원(寺院) 세력의 중추로 군림해 온 이유였다. 경원 이씨는 자신들의 사원 세력 장악을 위해 양창수렴법(養倉收斂法)이라는 이름으로 공포된 이 법의 내용을 비밀로 역사에 묻어버렸다. 양창수렴법이란 찻잎을 살청하고 유념한후 물을 뿌린(收) 베같은 천으로 싸서(斂) 창고에서(倉) 일정 시간 동안 은폐하는(養), 민황(燜黃)이라는 특수 과정을 추가하여 황차(黃茶)를 만드는 법을 가르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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