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 고려 왕실의 부흥을 꿈꾸다

문벌귀족 사원 세력에 눌린 문종의 왕실 부흥 승부수

by 역맥파인더

13. 고려 문종의 승부수


송나라 황제 신종(神宗)이 1068년 즉위 후 왕안석을 앞세워 야심 차게 추진한 희녕변법이 한창 추진될 때 고려엔 일본 사신단이 방문하고 있었다. 1071년 고려 문종(文宗)을 알현한 일본 사신단은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항해하는 선박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서해안과 남해안에 표류하게 될 때 선박 구제에 대한 지원을 고려에 요청했다. 당시 일본에서 수입한 차(茶)를 가공해 요(遼) 나라로 대부분 수출해 온 고려는 송나라가 일본의 차(茶)를 수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문종(文宗)은 사변(事變)이 일어나고 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경원(慶源) 이씨와 안산 김씨로 대표되는 문벌귀족 사원(門閥貴族寺院) 세력에 짓눌려 있는 왕권을 명실상부하게 만들 수 있는 계기로 삼으려 했다. 문종(文宗)은 일본에서 송나라로 떠나는 선박들을 적극 유치해 기항지(寄港地)로서의 고려의 입지를 최대한 활용해 송 황제 신종(神宗)의 구상을 뒷받침했다.


고려 숙종 때부터 기축 통화로 사용되어 온 은활(銀滑) <출처: Wikimedia Commons>


송나라의 재정자금(財政資金)으로 개발된 일본 시즈오카의 차(茶)들은 우선 물량 면에서 엄청났다. 기존 차(茶) 유통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고려내 세력(門閥貴族寺院)들은 왕안석의 신법에 협력을 아끼지 않는 문종이 자신들의 차(茶) 독점권을 빼앗으려 한다고 의심했고 그 의심의 일단이 확인되자 반란을 일으켰다. 1072년 문종(文宗)의 친동생 평양공(平壤公)이 연루된 반란이 시도되었고 곧 진압되었다. 문종(文宗)은 이 반란 진압을 기회삼아 자신의 일본 시즈오카 차(茶) 중계무역(中繼貿易)을 더욱 본격화했다. 왕실로 은병(銀甁)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1074년 문종은 송나라로 사신단을 파견해 곤경에 처해 있는 신종에게 고려는 왕안석의 신법에 의해 추진되는 국제무역정책을 지지(支持)하고 있으며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경원 이씨(인주 이씨)의 고려 왕실 혼인도 <출처: KBS1>


당시 문종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자연의 세 딸을 모두 왕비로 맞이할 만큼 경원 이씨들이 장악한 법상종단(法相宗團)의 지지(支持)가 절실했었다. 부왕(父王) 현종(顯宗)이 요(遼) 성종(聖宗)의 친정(親征)에 밀려 나주까지 몽진(蒙塵)을 가야 했을 때 공주 부사 김은부(金殷傅)와 경원 이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세 딸들과의 혼인을 통해 안산 김씨와 경원 이씨의 지지(支持)를 끌어낸 것처럼 문종도 경원 이씨 문중 출신 이자연(李子淵)의 세 딸들과의 혼사를 통해 문벌귀족(門閥貴族) 사원(寺院) 세력의 지원(支援)을 얻어 내려했었다. 경원 이씨가 다른 문벌귀족들과 확연히 다른 점은 그들이 법상종단이라는 사원 세력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경원 이씨가 장악한 고려 법상종단의 중추였던 속리산 법주사 전경


현종(顯宗)이 자신의 원찰(願刹)로 개경에 창건한 현화사(玄化寺)는 물론 김해(金海)의 감로사(甘露寺)와 연결시키기 위해 이자연이 창건한 개풍의 감로사(甘露寺), 대구 팔공산의 동화사(桐華寺) 그리고 보은 속리산의 법주사(法住寺), 나주의 심향사(尋香寺)와 김제 금산사(金山寺)로 연결된 물 샐 틈 없는 차(茶) 유통망이었다. 일본에서 들어오는 차(茶)들을 김해에서 받아 대구로 수송하고 울산으로 들어온 차들까지 보은 법주사에 모은 후 김제와 나주를 통해 각각 개경으로 나누어 올려 중국에 수출하는 유통망이었다. 결국 현종이 복원에 성공한 황차로 벌어들인 은괴(銀塊)들은 법상종단을 장악하고 있는 인주 이씨(경원 이씨) 문중으로 모두 들어갔다 해도 무방했다. 고려 왕조가 개창한 이래의 최대의 경제적 번영을 경원 이씨로 대표되는 문벌귀족 사원 세력이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문종이었다. 최충의 구재 학당 등 유교문화가 창달되고 있던 것은 불교가 문벌귀족에게 장악되어 있는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러한 번영은 문종의 아버지인 현종이 몸소 개발한 양창수렴법(養倉收斂法)이란 새로운 찻잎 가공기술 덕분이었다. 이 신기술로 가공해 만들어진 황차(黃茶)가 거란인들이 장악한 초원로 무역상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면서 온 나라에 경제적 활기가 넘치게 된 것이었다.


고려 법상종단의 차 수출단지였던 나주의 중심 사찰 <출처: Wikimedia Commons>



※ 표지 사진 출처: 윤명철 동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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